《터키 이스탄불의 중심부에 있는 탁심광장. 과거 유럽과 아시아, 중동의 상인들이 주변에 모여 교역을 했던 이 곳은 지금도 활기로 넘친다. 아타투르크(국부)로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의 동상을 중심으로 주변엔 호텔과 빌딩 등이 몰려 있다. 도로와 거리엔 차량과 인파로 붐빈다. 노상 카페에선 서양풍의 젊은이들이 모여 술과 차를 마신다. 사원에서 스피커를 통해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런던이나 파리 등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국민 절반이 "나는 유럽인"▼
터키는 역사적으로 그리스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문명이 고스란히 녹아 있고 지리적으로 유럽 아시아 중동의 중심에 있으면서 이들 지역의 문화까지 함께 아우르고 있다. 이스탄불을 비롯해 이즈미르 부르사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등지를 가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런만큼 터키의 모습은 무척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터키는 보스포루스해협을 중심으로 동쪽 97%의 국토가 아시아, 서쪽 3%의 국토가 유럽 대륙에 속해 있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아시아가 분명하지만 역사적 배경이나 국민 의식으로 보면 오히려 유럽에 가깝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터키인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절반 이상은 유럽인이라고 대답한다. 나머지는 아시아인이거나, 이도저도 아닌 터키인이라고 대답한다. 한 대학 교수는 “터키인은 아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유럽을 지향하고 있다”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국민의 99%가 이슬람 신자라 당연히 이슬람 국가처럼 생각되지만 일상생활에서 이슬람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도 특이하다.
이스탄불 북쪽에 있는 이스탄불종교대학. 정문 바로 옆에 창고 같은 조그만 방이 하나 있다. 이 대학 여학생들이 학교에 들어갈 때 들러 이슬람식의 머리가리개인 다시요르투를 벗어 놓고 가는 곳이다. 학교를 나갈 때 다시 찾아 쓴다. 이슬람을 가르치는 종교대학인데도 이슬람식 복장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4학년인 한 남학생은 “입학 당시엔 1학년 70명 중 여학생이 10명이나 됐으나 복장 문제로 대부분이 제적돼 지금은 2명만 남았다”고 말했다.
▼이슬람 복장 공식적 금지▼
일부 대학에선 아직 이슬람식 복장을 용인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론 금지다. 영어로 모든 수업을 진행하는 수도 앙카라의 중동공과대학은 이슬람식 복장을 한 학생은 아예 뽑지도 않는다. 입학 후라도 그런 복장을 한 학생은 수업을 들을 수도, 시험을 치를 수도 없게 한다.
이처럼 옷차림에서부터 터키는 다른 이슬람 국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거리에서 차도르 차림의 여성이 간혹 눈에 띄지만 유럽의 여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일반 여성의 옷차림은 서양 여성들과 별 차이가 없다. 이스탄불 북쪽 흑해 연안의 킬리요스 해변은 비키니 차림의 터키 여성들로 넘쳐난다.
이슬람 국가에서 금기하는 술에 관해서도 자유롭다. 술집이나 카페에서 술을 마실 수 있고 일반 가게에서도 얼마든지 술을 살 수 있다. 호텔 객실의 미니 냉장고엔 항상 술이 비치돼 있다.
하루 다섯 번씩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긴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하고 싶으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안해도 그만이다. 건축회사에 다닌다는 아뎀(35)이란 회사원은 “성직자나 독실한 신자만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하고 나머지는 하루 1, 2번 하거나 성일(聖日)인 금요일에만 기도를 하는 게 고작”이라고 말했다.
▼곳곳에 술집…공창도 버젓이▼
다른 이슬람 국가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엔 공창(公娼)도 각각 1곳씩 운영되고 있다. 아직은 성문화가 그다지 개방적이지 않지만 일부 젊은층을 중심으로 서서히 개방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터키의 이런 모습은 1923년 10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케말 파샤(장군)의 혁명에 의한 것이다. 그는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하는 ‘세속주의’를 채택하면서 근대화를 위한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던 일부다처제가 폐지되고 이슬람력 대신 양력이 채택됐다. 또 이슬람법 대신 유럽법을 모방한 현대법이 채택되고 금요일 대신 토·일요일이 휴일로 정해졌다. 이슬람식 복장이 공식으로 금지된 것도 이런 개혁의 일환이다.
앙카라 중동공과대학의 아이쉐 규네쉬 아야타 정치행정학과장은 “아타투르크의 개혁은 서양화, 민주주의, 경제적 부흥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집단보다는 개인이 주체가 되게 하고, 종교의 구속을 덜 받고, 자유롭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란 설명이다.
그렇다고 이슬람 종교 자체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다. 정부기관으로 이슬람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종교청이 별도로 있고 각급 학교에선 종교교육이 충실히 실시되고 있다. 전국에 수많은 사원이 있고 수십만명의 성직자가 활동하고 있다.이스탄불종교대학의 압둘아지즈 바인드르 교수는 “알라(신)와 인간 사이에 끼어든 온갖 불필요한 것들을 배제하고 인간에게 참된 자유를 주는 이슬람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개혁의 근본 취지”라고 강조했다.
▼모자이크의 도시 이스탄불▼
터키의 서쪽 끝에 위치한 제1의 도시 이스탄불.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과 007 첩보영화의 무대로 등장하기도 했던 이곳은 지리적, 역사적으로 볼 때 터키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탄불은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 쪽에 속하는 서(西)이스탄불과 아시아 쪽에 속하는 동(東)이스탄불로 나눠진다. 보스포루스 해협 위엔 다리가 2개 있어 자동차로 1분 남짓이면 건널 수 있고 배로는 15분 정도 걸린다.
동이스탄불은 대부분 주거지역이다. 서이스탄불은 다시 골든혼만을 중심으로 현대도시인 북쪽의 신시가지와 많은 역사적 유적이 있는 남쪽의 구시가지로 구분된다. 과거에는 중국에서 시작된 비단길이 부르사에서 끝났으며 다시 이스탄불을 통해 유럽으로 문명이 전파되기도 했다. 지금의 유럽철도는 이스탄불에서 끝난다.
이스탄불은 터키를 비롯해 불가리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그루지야의 내해인 흑해에서 마르마라해→에게해→지중해로 연결되는 해상교통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1400년 이상 비잔틴과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다.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길이 20㎞의 허물어진 성터를 보노라면 제국의 영화와 허무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페르시아→그리스→로마→동로마(비잔틴)→제4차 십자군→동로마→오스만제국의 지배를 거친 까닭에 왕궁 교회 사원 박물관 등 당시의 유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이스탄불은 당초 ‘비잔티움’으로 불리다 330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이곳을 로마의 두 번째 수도로 정하면서 이름도 ‘콘스탄티노플’로 바뀌었다. 이후 1100년 이상 같은 이름을 유지하다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지리적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이스탄불은 상업이나 관광 목적으로 찾는 전세계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터키 전체 면적의 0.97%에 불과하지만 전체 산업투자의 30%, 무역의 40%가 이 곳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지난해 240만명의 관광객이 이스탄불을 다녀갔다.
터키 관광청 이스탄불사무소의 누르한 톱추올루 부소장은 “이스탄불은 온갖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모자이크 도시’로 이곳에 오면 유럽과 아시아 중동, 고대 중세 근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자랑했다.
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