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적어도 이런 것은 안다. 권언(權言)유착은 꼴불견이고 권언전쟁은 소모전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최근의 언론사 세무조사 공방전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딱 부러지게 어느 한편을 들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안이 절박한 만큼, 양비론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둘 다 욕했다가는 기회주의자라는 욕을 듣기 십상이다. 그러는 사이에 사태는 통제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다.
지식인들도 입을 다물었다. 한마디 거들다가 십자포화를 맞아 거덜나는 상황에서 스스로 화염 속으로 뛰어들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침묵과 인내 속으로 ‘망명’한 듯한 인상이다. 권력이건 언론이건 택일하기를 강요하는 이런 분위기는 결코 누구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나, 이미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여야 정치인들은 입에 담기도 싫은 독설로 서로를 쓰러뜨리려고 혈안이 돼 있다. 몇몇 가까운 친구들에게 사족을 달지 말고 ‘O’ ‘X’ 택일을 물었더니, 흥미롭게도 ‘O’ ‘X’가 엇비슷했지만 뭔가 찜찜하다는 것이 공통적인 반응이었다. 그래, 사태의 본질은 바로 이 ‘찜찜하다’는 반응 속에 숨어 있다.
천문학적 세금을 부과한 정권을 두둔하면 위축될 언론과 비판의 자유가 걱정되고, 언론을 거들기에는 조세정의가 켕긴다. 그런데, ‘성역 없는 조세정의’와 ‘언론의 자유’ 사이에는 일말의 타협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당사자들은 두 개의 담론이 섞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정권은 조세정의의 칼날이 유력 신문사들의 심장을 관통해 무조건 항복을 끌어내고자 한다. 유력지들은 어떻게든 버텨 1년반이 빨리 지나가기를 학수고대한다. 치열한 담론의 각축전에 동원되는 이념적 무기들은 유례 없이 섬뜩해서 국민을 일종의 파시즘적 공간으로 몰고 간다. 그럴수록 사태는 본질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권언투쟁이 왜, 어디서 시작됐는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뒤바뀌는 상황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통치자의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다. 합법성을 앞세운 조세정의도, 정치적 의도를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도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더욱이, 싸움의 상대가 권력에 가장 껄끄러운 언론일 때, 개혁을 명분으로 한 중과세와 의법조치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언론사 사주와 간부들을 초청해서 개혁동참을 호소했던 집권초기에는 누구도 권언관계가 이렇게 악화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도 안돼서 유력 신문사들은 집권당의 기대에서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비판적 인사들을 전진 배치하고 개혁행보에 일일이 훈수를 두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급한 개혁행보가 낳은 역효과, 진언 묵살, 민심을 이반한 권력행사, 사회를 반분한 피아(彼我)의식 등. 때론 감정 섞인 보도와 필체를 동원한 언론의 급격한 변신에 정권은 정권대로 약이 올랐을 것이다. 통치자는 돌아선 연인에게 동정을 호소하기도 했고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투박하게 통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선 언론은 막무가내였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끈질긴 구애 끝에 변심이 최종 확인된 애인에게 몰아친 오뉴월의 서리였다. 그래서 찜찜하다. 조세정의를 못박는 합법적 치장도 찜찜하고, ‘지은 죄’를 불문하고 언론자유에 호소하는 유력 신문사들의 구난 요청도 어쩐지 미덥지 않다. 빅3 신문의 고난이 마땅히 치러야 할 죄가임을 외쳐대는 방송사와 군소 신문사들의 태도가 차기 정권에서는 어떻게 변할지도 궁금하다.
이 모든 혼란은 보수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에 소수의 진보진영이 집권당으로 선출된 데서 유래한다. 보수의 깊은 골 속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던 우리에게 진보란 필요한 약이다. 그런데, 멱살을 잡고라도 다수의 보수를 개혁의 대열로 끌고 가려 했던 진보의 방식은 무리수였으며, 임기 내에 결딴을 내려는 집권당의 욕심은 자주 화를 불렀다.
정권 출범 이전부터 유력지들은 등을 돌린 상태였다는 여권의 항변에도 동정이 가지만, 어쨌든 나는 불문곡직하고 ‘X’다. 곡학아세든 읍소든 좋다. 나는 묻고 싶다. 국민이 직접 선택한 정권이 도대체 어찌했기에 유력지들이 모두 저격수로 돌변했는가? 그들을 돌이킬 방도가 그렇게도 없었는가? 현 정권의 개혁정치가 어떠했기에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최대의 자충수임을 터득하고 있는 신문사들이 과감하게 탈주하게 됐는가? 그런 질문들 말이다.
송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