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술진흥재단(약칭 학진·이사장 김성재)이 1998년 시작한 ‘동서양 학술 명저 번역지원 사업’의 결실로 그동안 경제적 이유로 출판이 어려웠던 고전들이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고전 번역의 현실을 무시한 지원 방식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최근 학술진흥재단의 ‘학술 명저 번역총서’ 첫 권으로 영국 경험철학의 선구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대표작 ‘신기관’(한길사)이 출간됐다. ‘신기관’은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도 소개된 ‘우상론(偶像論)’을 논한 책으로 연역법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기관’을 극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연히’ 번역됐어야 할 고전들이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외면을 받다가 뒤늦게 번역 출간된 데는 학진의 역할이 크다. 학진은 이번 학술 명저 번역 지원사업 이전에도 83년부터 꾸준히 고전 번역 사업을 지원해왔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루카치 미학’(미술문화)도 학진의 도움으로 출간된 고전. 헝가리 태생의 미학자로 20세기 철학과 미학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루카치의 이 책은 미학 분야에서 20세기의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책이다. 이 책의 번역자들은 이미 80년대 후반 번역에 착수해 상당부분 번역을 마쳤지만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99년 학진의 지원 결정으로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학진의 사업 지침이 까다로워 번역자가 제대로 된 번역을 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번역기간이 원칙상 1년으로 설정돼 있고 번역자는 반드시 2차례의 중간보고를 해야하며 이를 어기면 번역 지원금 전액을 반환해야 한다는 등의 규정이 그것. 최고 6개월까지 번역기간을 연장해주기는 하지만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라는 지적이다.
일반적으로 고전 번역서를 출간하는 출판사들은 권당 적어도 3∼4년의 번역기간을 할애한다. 97년 플라톤의 ‘국가’에 이어, 2000년 ‘티마이오스’의 원전을 번역해 출간한 서광사는 20여년 전부터 플라톤 전집 출간을 기획했다. 최근 아리스토 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를 원전 번역해 출간한 궁리 역시 번역작업에만 4년여의 시간을 투자했다.수익성이 낮은 고전들은 일단 번역 출간되면 재출간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처음에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불완전한 번역이 유일한 번역본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학진의 지원금을 받아 번역작업을 하고 있는 C씨는 “고전 번역은 단순히 원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하며 진행해야 하는 작업”이라며 “1년 안에 끝내기 위해서는 무리한 번역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번역 관계자들은 학진측이 현행 번역 지원제도를 개선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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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