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충청도 산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한 겨울 새벽이 되면 나는 일어날 시간이 되어서 잠에서 깨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의 냉기 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다.
그 새벽에 나는 지주가 아버지를 불러내어 왜 빚을 갚지 않느냐고 호통치는 것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보다 나이 어린 지주에게 수모를 겪은 아버지는 수치심 때문에 자식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 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사회 생활 시간에 “우리의 역사에는 춘궁(春窮)에 굶주린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봄에 양식을 꿔주었다가 가을에 갚는 훌륭한 환곡 제도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소견에도 ‘그런 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기억이 선연하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자금 압박을 받을 때 흔히 하는 말로 ‘과부 대동빚을 지더라도…’라는 속담이 있다. 그 본래의 의미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멍에와 같은 고리채(高利債)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고, 실제로 거기에는 사악한 뜻이 담겨 있다.
원래 대동법(大同法)이란 지방의 특산물로 세금을 바치던 것을 쌀로 일원화하여 바치는 제도를 의미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토지 제도가 문란해졌다. 농지도 황폐하여 민생의 삶이 어려워지고, 화폐 제도도 무너져 국가 재정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세 제도를 일원화한다는 의미에서 그 당시로서는 가장 확실한 재화(財貨)였던 쌀로 세금을 받았는데 이러한 제도는 나름대로 합리성을 띄고 있었다. 1608년(선조 41년)에 경기도 지방부터 시작된 대동법에 따르면, 시기별 지역별로 다소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논 1결(結·약 3000평)당 미곡 13∼16말을 징수해 그 중에서 8∼10말은 중앙의 선혜청(宣惠廳)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지방 재정에 충당했다.
그런데 수리가 발달되지 않았던 전통적인 천수답의 농경 사회에는 소위 보릿고개라고 하는 계절적 빈곤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
이제 대동미는 조세의 편의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백성들의 짐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환곡이라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환곡이란 보릿고개에 양곡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되받는 제도로서 처음에는 좋은 뜻에서 출발했고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구휼(救恤) 제도는 매우 오래 전부터 실시되었다. 이미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16년(194년)부터 시행된 바 있고, 고려 시대와 조선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실시되어 오던 이 제도가 상설 제도로 정착된 것은 인조 4년(1626)이었다. 대동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임진 병자의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 재정이 황폐해지고 농촌의 삶이 곤궁해진 데 그 실시 이유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상평창(常平倉) 또는 진휼청(賑恤廳)을 통해 환곡을 시행했다. 이 제도는 일제 시대인 1917년까지도 존속되었다.
당초 환곡의 이자는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 20%(연리로 치면 40%)였고, 조선조 후기에 들어오면 6개월에 10%(연리 20%)였으니까, 오늘의 제도에 비하면 다소 고리(高利)였다고는 하지만 가혹한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이를 흔히 장리(長利) 쌀이라고 불렀다. 이 장리쌀이 대동법과 시기적으로 맞물리고 혼재되어 훗날에는 그 양자를 구별하지 않은 채 모두가 고리채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관리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농민들로서는 춘궁에 환곡을 얻는다는 것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농민들이 요구하는 환곡의 절대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자 남이야 굶주리든 말든 이런 때에 재산을 불릴 수 있다고 착안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지방의 토호 지주들이었다. 지주들은 처음에는 아름아름으로 쌀을 꾸어 주었고, 그 이자도 조정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쌀이 화폐의 대용이었던 시절, 쌀을 꾼다는 것은 단순히 식량의 의미를 넘어서 그 자체가 상업 자본으로서 화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주들은 쌀을 매개로 한 축재를 시작했고, 이자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이러한 고리채에 대해 저항할 수 없었고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결국 장리 쌀의 이자는 높아만 갔다. 봄에 1섬을 빌려 6개월 후인 가을에 1섬 반으로 갚았으니 6개월 이자가 50%인 셈이며 연리로 치면 100%인 고리채가 되었다.
농민들은 당장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쌀을 꾸었지만 가을이 되면 빚을 갚기는커녕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장리 쌀을 꿔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농민들은 이 빚의 악순환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본래의 의미는 좋았지만 대동법이니 환곡이니 장리 쌀이니 하는 것은 결국 소작농을 영원히 소작농으로 묶어 놓는 굴레가 되었으며 지주들은 이러한 굴레를 통해 영원히 지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요즈음의 은행 대출 이자가 연리 11%라는 사실과 은행 이자를 0.1%만 낮춰 주어도 기업의 형편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생산성이 낮았던 조선조 당시의 소작농에게 연리 100%라는 것이 얼마나 가혹했고 견디기 어려운 굴레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환곡은 그 당시로서 달러 빚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악덕 이자 놀이였지 결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소작농에 대한 환곡의 악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인권마저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곧 초야권(初夜權)이었다.
초야권이라 함은 소작농의 딸이 시집가기 전 순결을 지주에게 먼저 바쳐야 하는 악습을 의미한다. 그러니 소작농에게 과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지금도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대동법이나 환곡이 이토록 악법으로 변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것이 좋은 제도라고 속아 배워야 했을까?
그것은 이 시대의 역사가 가진 자들의 기록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국유화 시대’를 살았던 농민들로서는 그들의 아픔과 한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들의 한은 대물림됐다.
이 환곡의 모순에 대해 최초로 항변한 것이 곧 갑오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5월에 전주성(全州城)을 점령한 농민군이 정부군에게 제시한 폐정 개혁 14개조였다. 더욱 기 막힌 일은 해방을 맞이한 후에도 이 전근대적인 악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농경 사회를 살아온 한국인에게 토지와 쌀은 영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영혼을 가질 길이 없었다.
나는 여기에서 민중이, 또는 농민이 역사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식의 시각을 제시할 뜻은 없다. 다만 가난하고, 그래서 배우지 못한 민초들은 압제받고 산 것만도 한이 맺히는데 역사마저도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이면을 환곡이라는 이름으로 뒤집어 보여주고 싶을 따름이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