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빠듯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에호 모스크바 라디오 방송국을 찾아 ‘언론 자유’를 주제로 한 특별회견을 했다.
이에 대해 크렘린궁은 불편한 감정을 나타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에호 모스크바 등 미디어-모스트그룹 계열 언론사에 대해 세무사찰과 검찰수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난 지금 이 방송은 러시아 정부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4일 법원 판결로 국영기업 가스프롬으로 경영권이 넘어갔지만 에호 모스크바 직원들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권력과 거대 국영기업에 맞선 에호 모스크바의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할 정도로 무모해 보인다. 모기업인 미디어-모스트는 공중분해됐고 다른 계열사들은 모두 정부의 탄압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3대 전국 방송 중 하나였던 NTV는 가스프롬에 경영권을 뺏겼고 많은 직원들이 방송국을 떠났다. 일간지 세보드냐와 시사 주간지 이토기는 문을 닫았다.
러시아 최대의 민간언론그룹이던 미디어-모스트는 가스프롬에 진 2억6000만달러(약 3380억원)의 채무를 갚지 못해 경영권을 뺏겼다.
러시아 정부는 이는 언론 탄압과 무관한 ‘적법한 채권 행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무조사와 은행의 신규대출 중지 등 외압이 없었다면 이 정도 규모의 채무 때문에 경영권이 넘어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대부분의 러시아 대기업들은 이보다 몇 배 많은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모스트측이 ‘언론탄압’이라고 반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에호 모스크바 직원들은 가스프롬으로 넘어간 지분을 인수해 방송사를 운영하겠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현재 직원들이 ‘우리사주’ 형식으로 가지고 있는 지분은 28%.
창업자인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자신의 소유 14%를 사원들에게 양도키로 이미 약속했다. 에호 모스크바 직원들은 가스프롬에 9%의 지분만 넘겨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 51%의 지분으로 경영권을 되찾고 방송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90년 개국한 에호 모스크바는 91년 보수파의 쿠데타 당시 방송을 중지하라는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요구를 거절하고 방송을 계속하는 등 러시아 민주화와 시장개혁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모스크바의 메아리’라는 뜻의 에호 모스크바 사태는 러시아 언론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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