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택(25·삼성증권)을 만난 것은 유난히 후텁지근했던 18일 오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섭씨 30도를 넘는 기온 속에서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약속 장소인 서울 올림픽공원 코트에는 ‘내일의 이형택’을 목표로 한 테니스 꿈나무들이 ‘땡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국 테니스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이형택. 지난해 US오픈에서 16강 신화를 이뤘고 한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투어 결승에 진출하기도 했다. ‘마의 벽’이라던 세계 랭킹 100위권에 진입한 뒤 63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그는 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출국해 다음달 27일 개막되는 올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US오픈에 대비하기 위해 그 전초전 성격의 5개 대회에 연속 출전한다.
라켓 하나로 세상을 호령한 이형택은 자연스럽게 후배들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요즘 주니어 선수들을 보면 신체조건도 뛰어나고 훈련여건도 좋은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외국 선수들과 자주 싸워보고 경험도 쌓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저만해도 너무 늦은 감이 있어 아쉬워요.”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난 이형택은 공부보다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산골 소년이었다. 우천초등학교 때 테니스가 왠지 멋있어 보여 방과 후 곧장 코트로 달려가 철망 너머로 경기를 지켜봤던 게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어릴 때 우상은 없었어요. TV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변변한 잡지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누가 잘치는 줄도 몰랐거든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저 운동이 좋아 뛰어다닌 이형택은 국내 테니스 현실을 따끔하게 꼬집었다. “너무 이기기 위한 테니스에만 집착하고 있어요. 공격적으로 제압하려하지 않고 상대방의 에러를 바라는 소극적인 경기가 많아요. 더구나 중고등학교 때 너무 혹사당해 운동에 재미를 못 느끼고 쉽게 그만두는 경우가 많죠.”
국제무대 진출을 희망하는 후배들에게는 해주고 싶은 얘기로는 영어 공부를 먼저 꼽았다. “영어 구사 여부에 따라 상황이 180도 달라져요. 저도 영어 때문에 애를 먹었어요. 교포 도움을 받아 기자회견을 했고 억울한 심판 판정에 어필도 할 수 없어 힘들었죠. 영어를 하면 편안하게 경기에만 전념할 수 있어요.”
최고 스타로 성장한 그도 테니스를 그만 두고 싶은 때가 있었을까.
“초중고 시절에 운동이 잘 안될 때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하지만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시즌 전반기에만 해도 이형택은 국내에서나 알아주는 우물안 개구리 신세였다. 그러나 1년 사이에 눈을 비비고 다시 볼만큼 달라졌다. B급 대회인 챌린저대회를 전전하다 수십만 달러 규모의 투어대회 본선에 직행했다. 대회에 나가도 변변한 훈련 파트너를 못 구했으나 요즘은 정상급 프로들과도 스스럼없이 몸을 풀 게 됐다.
“챌린저대회에 나가면 숙소나 끼니를 일일이 알아서 해결해야 되는데 투어대회는 승용차도 나오고 호텔과 식사도 제공받기 때문에 차원이 다르죠. 잘 하는 만큼 대접받는 것 같아요. 연습상대를 구하기 힘들었으나 요즘은 다른 선수들이 먼저 요청하고 있어요.”
그만큼 이형택을 한 단계 끌어올린 비결은 무엇일까. “기술보다도 자신감과 경기운영이 나아졌어요. 랭킹이 높은 선수와 붙어도 주눅들지 않고 위축되는 게 없어졌어요. 전에는 한번 지고 나가면 뒤집지를 못했는데 근성도 더 붙은 것 같아요. 그러나 서비스 리턴과 세컨드 서브에서는 여전히 많이 밀려요.”
장 기억에 남는 승부는 역시 지난해 US오픈에서 최강 피트 샘프러스(미국)와의 16강 전. “샘프러스와 경기하는 날 새벽에 잠이 오지 않고 가슴이 무척 뛰었어요. 신문이나 뉴스에서나 보던 대 스타와 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거든요. 내가 몇 게임이나 따낼 수 있을까, 0-6으로 무너지지 않을까 오만 생각이 다 나더라고요.”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징크스도 있다. “희한하게 어머니가 경기장에 응원을 오면 졌어요.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어머니가 아예 코트를 찾지 않으셨죠.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면 성적이 좋았어요. 아버지는 제가 테니스를 시작하기 전에 세상을 뜨셨는데 올 초 번번히 1회전에서 탈락할 때 성묘를 갔다왔더니 그 후에는 결승까지 올랐어요.”
유명인사가 된 데 따른 불편함도 있을까. “얼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져 아무래도 주위를 의식하게 돼요. 예전보다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됩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조금 멀어져 아쉬워요. 제가 좀 컸으니까 모르는 척 하지 않을까 여기는 고향 친구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형택 정도면 으뜸 신랑감 아닐까. 올시즌 목표와 장래 계획을 물어보았다. “만나는 여자 친구가 있지만 결혼 계획은 아직 없어요. 은퇴한 뒤에나 생각해 볼까 해요. 다음주부터 미국에서 매주 대회에 나가요. 여기서 꾸준히 8강 이상에 들며 컨디션 조절을 한뒤 다음달 US오픈에서 지난해 같은 성적을 거두고 싶어요. 정상에 있을 때 물러나고 싶어요. 앞으로 2∼3년 더 뛴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코치 수업과 영어를 배우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난 뒤 이형택에게 기자를 향해 서브 몇 개를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리 프로의 서브라지만 나도 20년 가까이 테니스를 쳐왔는데 서브 하나 못받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웬걸. 백핸드 쪽으로 들어온 서브는 라켓을 갖다 대기도 힘들었다. 맞더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기 일쑤였다. “아이구, 그만 하자”고 했더니 이형택은 “실제 대회때 제 서브 최고 시속이 190㎞인데 그것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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