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들어 국내 기업의 활력이 현저히 저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동안 국내 자산의 저평가를 계기로 활발했던 해외기업들의 국내 진출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물론 예상보다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세계경기 침체로 인한 일시적 현상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권위 있는 경제잡지인 포브스의 최근 나라별 기업여건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처한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포브스지는 창업비용과 자본시장 접근 용이도 등 기업여건을 감안할 때 한국은 조사 대상 25개국 중 대만 말레이시아는 물론 심지어 중국보다 못한 18위로 평가했다. 특히 미국의 헤리티지재단과 케이토연구소는 규제가 없는 경제자유도 면에서 한국을 경제력에 걸맞지 않게 123개국 중 43위로 평가했다. 이러한 외국기관들의 시각을 감안하면 최근의 투자부진 현상은 불행하게도 과다한 규제로 인해 쉽게 개선될 수 없을 것으로 우려된다. 실로 국내경제는 외환위기 이후 시장경제 체제로의 이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업들은 3중 규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종 규제의 종합전시장이 된 한국의 현실을 살펴보자. 우선 과거 개발경제 시대에 만든 시장예속형 규제의 틀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최근 3년 동안 정부는 정부개혁의 차원에서 행정규제를 완화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 결과 분야별로 많은 규제가 철폐 또는 완화되었으나 아직도 핵심규제들은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의 규제개혁에 대해 내린 ‘단기적 수치목표 달성에 초점을 두어 효과가 회의적’이란 평가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축소되지 않고 오히려 비대해지고 있는 행정조직이 이러한 현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더구나 과거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도입된 규제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 지구상에 유일한 30대 계열그룹 지정제도가 그대로 있고 적대적 인수합병(M&A)이 허용되면서 한때 폐지되었던 출자총액제한 제도도 부활해 국내 대기업이 외국기업에 비해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국내기업의 과다한 차입경영이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98년 이후 기업의 재무행위를 직접 통제하는 각종 규제가 도입되었다. 업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부채비율 규제와 해외 현지법인의 현지금융 차입규제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구(舊)경제 기업들은 차입금을 축소할 수밖에 없어 수익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미래 성장사업에 대한 투자 확대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밖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정부는 시장경제 체제의 기초가 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정착시키기 위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시행하고, 사외이사제를 도입했으며, 결합재무제표 작성을 의무화한 데 이어 집단소송제도를 곧 시행할 예정이다.
국내경제는 현재 신용경색 현상이 재발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이 새로운 규제에 빨리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제표준에 적응하기 어려운 지방 중소기업이 좋은 예이다. 금융기관의 평가 기준이 높아짐에 따라 이들은 철저히 외부금융에 차단됐다. 지방경제가 쇠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기업의 투명경영을 보장한다는 집단소송제도도 과거 금융실명제 도입처럼 기대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부작용만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소송의 대상과 요건, 배상액 산정에 있어 엄격한 통제와 전문성이 없는 등 여건이 정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제도를 시행할 경우 기업들은 소송으로 인한 부도 위험 때문에 미래지향적인 경영을 추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제도는 현재 IMF의 관리에 들어갔던 멕시코, 칠레, 러시아와 미국을 제외하고는 지구촌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국내에는 과거 계획경제 시대의 기초가 되었던 각종 규제와 영 미식 시장체제의 규범이 혼재해 있다. 이 때문에 미래의 비전에 대한 혼돈이 가중되고 있으며 경제 사회 정책의 일관성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금년 하반기에는 각종 규제가 근본적으로 정비돼 사회주의 국가보다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 국내경제의 장기 발전기반이 마련됐으면 한다.
정문건(삼성경제연구소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