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1등을 단 한번도 놓치지 않은 학생이 있었다. 이 학생이 전학을 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갑자기 성적이 곤두박질친 그는 반에서조차 10위권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 학생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무슨 말도 안되는 얘기냐고 따져 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실제 상황이다. 아니 오히려 더한 경우였다.
1990년대 한국 프로야구의 최고타자로 군림했던 이종범 선수(31). 야구를 모르는 사람조차도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슈퍼스타인 그는 98년초 쉬운 말로 청운의 꿈을 품고 국내 프로야구단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동렬(현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이 마무리투수로 활약하고 있던 일본의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했다.
당시 팬과 전문가들이 그에게 건 기대는 실로 대단했다. 발이 빨라 생긴 별명인 ‘바람의 아들’에서 야구에 관한 한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났다는 ‘야구천재’에 이르기까지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닌 그였다. 때문에 한국에 비해 다소 수준이 높은 일본프로야구이긴 하지만 최소한 이종범만은 일본에서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설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입단 첫해에는 그런대로 잘했다. 그러나 여름에 가와지리라는 이름도 이상한 투수가 던진 공에 맞아 왼쪽 팔꿈치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뒤부터 이종범은 ‘사구 공포증’에 시달리며 평범한 선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결국 ‘야구천재’의 명성에 오점을 남긴 이종범은 일본에서의 3년반 동안 참담한 성적표와 함께 ‘사나이의 굵은 눈물’을 남겨둔 채 지난 6월20일 가족과 함께 쓸쓸히 중도귀국했다.이후 한달여간 언론과의 인터뷰를 일절 사양했던 이종범을 광주야구장에서 만났다.
“감개 무량하지요. 짧지만 제겐 너무나 긴 시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걱정이 앞섭니다. 그동안 두달 이상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해 감각이 많이 무더져 있는데다 요즘 후배들의 실력이 워낙 향상됐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이종범은 8월1일부터 해태 구단을 인수해 출범하는 기아 타이거즈 선수로 3년반만에 국내 무대에 복귀하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고액인 연봉 3억5000만원에 기아차에서 생산하는 4500만원 상당의 고급승용차를 지급받은 최고 스타의 출사표치고는 너무나 초라했지만 오히려 그의 성숙함이 묻어나오는 표현이었다.
얼마나 일본에서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음고생요?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오죽했으면 젊은 나이에 머리가 빠지는 원형 탈모증까지 걸렸겠어요. 한국에 돌아오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요. 머리도 다시 자라고 있으니까요.”
농담까지 곁들이며 환하게 웃은 이종범은 일본에서의 실패원인을 묻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첫째 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첫해에 당한 팔꿈치 골절상이 결정적이었죠. 팔꿈치가 부러지기 전까지는 한국에서만큼은 아니라도 만족할 만큼 잘 때리고 잘 달리고 있었죠. 뼈가 부러져 남은 시즌을 병원에서 보내게 된 뒤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여기에 언어장벽에 따른 대화단절과 음식의 차이 같은 문화적 차이도 중요한 원인중 하나였죠. 특히 일본야구는 감독이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는 감독야구에요. 감독이 선수가 마음에 안들면 그 선수는 죽고 말죠.”
이종범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는 질문에 “내 경우 가을훈련 캠프에 2년연속 참가하지 않은 것이 호시노감독의 미움을 샀다. 호시노감독은 중남미 외국인선수의 경우 가을훈련 불참을 용인했지만 한국 선수에 대해선 일본 선수와 같은 규정을 적용하려 했다. 사인 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외국인 선수로 호시노감독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며 감정을 격앙시키기도 했다.
갑자기 기자는 과연 일본야구에서 한국인 선수에 대한 ‘이지메’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의 여기자가 와서 나에게 직접 해준 얘기를 소개할게요. 그가 호시노감독에게 ‘아시아 선수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지 취재요청을 하자 호시노감독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일본에서 성공한 한국선수는 현재로선 선동렬 선배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일본에 진출한 다른 한국인 선수가 자질이 부족해 실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 이종범은 “앞으로 일본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란 질문에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까 말했듯이 일본은 감독야구입니다. 감독을 잘 만나는 게 중요하죠. 이왕이면 투수는 투수출신 감독, 타자는 타자출신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팀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일본은 그리 권장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미국은 괜찮지 않을까. 주니치 구단에서 자유계약선수로 풀린 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와 접촉설이 있었는데 한국행을 결정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일본에서 8억원의 연봉을 받았는데 돈 욕심이 있었다면 일본에 더 있었을 수도 있었죠. 또 자존심만 생각했으면 미국으로 갔을 겁니다. 당시 명문구단 뉴욕 양키스에서 올시즌 중간에 합류하는 연봉으로 35만달러(약 4억5000만원), 내년 연봉으로 100만달러(약 13억원)를 제시했어요. 짧지만 30년 이상을 살면서 돈이나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이 정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연봉이 적고 자존심에 상처는 갔지만 내 나라 내 조국, 그리고 나를 아껴주는 팬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싶었지요.”
이종범은 일본에서의 실패가 처음엔 자존심이 무너져 겁이 났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 실패가 자신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는 어른스런 말을 했다.
“건방진 얘기같지만 여태껏 야구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이런 점에서 일본에서의 좌절은 큰 교훈이 됐습니다. 2군에 있는 무명선수의 설움과 부상선수의 아픔을 몸으로 깨달았죠. 내가 나중에 지도자가 됐을 때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이종범은 “이런 점에서 성공가도만 달린 선동렬 선배보다 내가 낫지 않겠어요”라며 활짝 웃었다.
이종범은 한국에 돌아와서 한달여동안 본 한국야구에 대해선 “많이 변했다. 내가 갈 때보다 투수는 어린 선수들이 많은 게 특징이다. 이들은 대개 공의 스피드는 빠른데 제구력이 예전보다 안좋았다. 특히 투스트라이크 이후 유인하는 볼이 약해 보였다”는 지적도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도 질책을 아끼지 않았다.
“요즘 해태 선수단과 훈련을 같이 하고 있는데 김성한감독과 이건열코치가 내 타격폼을 보더니 놀랍도록 정확하게 지적을 해줬습니다. 예전에는 강한 손목을 이용해 공이 방망이에 맞는 임팩트 순간 방망이를 확 꺾으면서 힘을 배가시키는데 이젠 갖다 맞히는 스윙으로 변했다고 했죠. 아마 팔꿈치를 다치고 난 뒤 생긴 버릇일 것입니다. 김감독의 지적대로 타격폼을 예전처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8월1일 기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출전하는 이종범의 목표는 무엇일까.
“당장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후반기 이후부터 경기에 나가 얼마나 대단한 성적을 올리겠습니까. 팀이 4위안에 들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해요. 올해는 생소한 투수들을 열심히 연구해서 내년 시즌 개막전 첫 타석부터 완벽한 상태로 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종범은 “국내에서 재기에 성공한 뒤 일본에서 또다시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묘한 질문에는 “다시는 일본에 가지 않을 것이다”고 잘라 말했다.
▼이종범은…▼
△1970년 8월15일 광주 출생
△광주일고-건국대 졸업
△신장 1m78, 체중 73㎏
△생활신조;항상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93년 해태 타이거즈 입단
△97년 12월10일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
△2001년 7월20일 국내프로스포츠 사상 최다연봉(3억5000만원)으로 기아 타이거즈 입단
[주요 기록]
△93,97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
△94년 페넌트레이스 최우수선수
△타격 4관왕(94년)
△시즌 최다안타(196개·94년)
△시즌 최다득점(109점·94년)
△시즌 최다도루(84개·94년)
△30홈런-60도루 달성(97년)
▼이종범의 매력은…▼
짧게 깎은 머리에 무스로 한껏 ‘자존심’을 세운 헤어 스타일. 몸에 꽉 끼는 셔츠를 입고 짙은 선글라스에 가죽 손가방을 들고 다니는 이종범을 실제로 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어떻게 저런 체격의 선수가 한국을 대표하는 프로야구의 최고타자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게 첫 번째 의문이다. 이건 ‘극비사항’이지만 이종범은 요즘 뱃살이 약간 불어 76㎏까지 살이 쪘지만 국내에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의 몸무게는 68㎏에 불과했다. 얼굴이 갸름하고 작은 것도 그의 우람한 팔뚝 근육을 감추는 비결이다.
또 하나 주위를 놀라게 하는 것은 보기와는 달리 너무나 순수하다는 점이다. ‘광주 촌놈’을 자처하는 그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쉽게 형님이란 말을 쓴다. 운동선수치고는 달변으로 누구와 만나도 대화가 끊기지 않는 것도 이종범의 매력중 하나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것도 그의 장점이자 단점. 최근 기아 타이거즈와 계약할 때도 그는 국내 스포츠 사상 최고액인 3억5000만원에 도장을 찍고 난 뒤 “나는 이 연봉을 다 주는 줄 알았다”고 말했었다. 프로야구에선 시즌중 계약을 할 경우 2월부터 11월까지 연봉을 10개월치로 나눠 활동기간만 연봉을 지급해 이종범이 실제로 받는 연봉은 1억4000여만원에 불과하다.
만난사람=장환수기자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