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는 얼마나 객관적이며 정확하고 정직할 수 있으며, 그들의 학통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고, 상황의 논리로부터 얼마나 용감할 수 있을까?
멀리는 사관(史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해 가까이는 이념의 굴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학은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복잡다단하다.
특히 한국 사학사가 이토록 어려움을 겪은 것은 일제시대라고 하는 타율적 세뇌의 과정이 너무도 길고 집요했기 때문이다. 한 세대를 넘는 시간 속에서 일제의 세뇌를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사에서의 외압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역사학의 굴절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다음과 같은 소극(笑劇)은 여염의 우스개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장수왕때 세원진건 사실
1979년 충북 중원(中原)의 입석리(立石里)에서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비석이 발견됐다. 그것이 국경을 개척하면서 세운 비석(척경비·拓境碑)인지 아니면 단순히 국왕이 수렵이나 순행을 나왔다가 세운 비석(순수비·巡狩碑)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비석이 여기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여기까지 남진했다는 뜻이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 비석이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년)에 의해 세워진 것만은 틀림없지만 풍상으로 마모된 글자의 판독 과정에서 많은 견해들이 속출했다. 사학계에서는 관련 교수들의 학술회의를 마련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 비석이 언제 세워졌느냐 하는 것. 물론 이를 풀어줄 단서가 될 만한 글자가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문제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당시 사학계의 큰 어른이신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박사는 비석을 분석한 후 이 비석이 건흥(建興) 4년(475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젊은 학자들이 그 논거를 묻자 두계는 “내가 하도 오매불망(寤寐不忘)했더니 꿈에 그렇게 나타났다”고 대답했고, 자리를 함께 했던 후학들은 “이 학문적 집념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사로운 자리에서 오고간 객담이 아니고 학회에서 발표되어 학술지에 게재된 사실이다.(李昊榮, ‘中原 高句麗碑 題額의 新讀’, ‘史學志’(13), 136∼138쪽, 1979)
역사학계에서는 두계와 그를 잇는 학파를 실증주의 학파라고 부른다. 실증주의를 특징짓는 명제는 과학만이 가장 타당한 지식이며 사실만이 지식의 가능한 대상이 된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사실과 과학에 의해 확인된 법칙을 넘어서는 어떠한 힘이나 실체의 존재 및 그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며, 어떠한 형이상학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연구 방법을 배격한다.(金榮漢, ‘실증주의 사관’, ‘사관이란 무엇인가’의 59∼60쪽 1980)
이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진실로 서글퍼하고 우려하는 것은, 당시 83세의 노령이었던 두계가 한때 총명을 잃고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그 자리에 있던 젊은 학자들, 신학문을 배웠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그들이 이를 말릴 수도 없었던, 그래서 그것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학계의 풍토이다.
그 자리의 젊은 학자들은 두계의 그러한 발언을 듣고 감격해 이를 기록으로 남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 끼리만의 얘기로 알고 덮었어야 옳았다. 자신의 견해에 도전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재야 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준열(峻烈)히 비판했던 한국사학계가 이 대목에 있어서는 왜 그토록 참혹한 실수를 저질렀는가?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참여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 우리는 이병도를 중심으로 하는 세칭 두계학파의 형성 과정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1922년, 3·1운동의 여진(餘震)이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자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중심으로, 식민지 정책을 문화 동화 정책으로 바꾸면서 일본이 조선의 병합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조선사를 쓰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방침을 위해 총독부 훈령 64호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구성해 정무총감(政務總監)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가 그 위원장을 겸직하고, 이완용(李完用)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당시 조선사를 일본인 학자들만 쓸 경우, 한국인에 대한 설득력이 약할 것이라고 판단한 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에 한국의 청년 사학자들을 참여시키기로 했고, 이완용이 그 인선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당시 와세다대(早稻田大)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고 있던 문중의 족손(族孫)인 이병도와 최남선(崔南善), 그리고 이능화(李能化) 등을 발탁했다.(‘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 122∼131쪽, 1938)
이들은 당시 식민지 사학의 첨병이었던 교토(京都)제국대 교수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총독부 시학관(視學官)으로 식민지 역사 교육을 주관했던 오다 쇼고(小田省吾) 등을 도와 ‘조선사(朝鮮史)’의 편찬에 착수했으며, 이렇게 하여 1938년에 완간된 ‘조선사’ 전35권은 식민지사학의 원전이 되었다.
◇해방후 한국사학계 주도
이제 와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병도 등, 이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멤버들이 1934년에 창설된 진단학회(震檀學會)의 회원으로서 일제 시대의 한국사학계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해방을 맞이한 이후에도 이 인력들이 한국 사학계의 중추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진단학파는 해방 이후 학회 활동을 더욱 활발히 하여 ‘한국사’ 전6권(을유문화사)을 집필 간행하는 등 한국 사학사에 주목할 만한 발자취를 남긴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후 이들과 이들의 후학들은 실증사학을 표방하면서 이선근(李瑄根)이 주도했던 민족주의 사관과 함께 쌍벽을 이루면서 한국 사학계를 지배했다.
물론 진단학회에는 김상기(金庠基)나 이상백(李相佰)과 같은 또 다른 무리의 훌륭한 학자들이 있었고, 학통과 진실 사이에서 고뇌한 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계의 학통은 여전히 도제와 같이 엄숙했고 선학(先學)에 대한 비판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신선의 현몽(現夢·꿈에 나타남)’ 앞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사관 잔재 아직도 남아
지금 우리 사회는 또다시 일본 교과서 왜곡으로 술렁거리고 있다. 저들의 곡필(曲筆)에 대해 비분강개하기보다는 내부 식민지 사학을 청산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해방 반세기가 지난 지가 얼마인데 아직도 식민지 사관의 청산에 목을 매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뿐 아니라 어쩌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태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