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한 동을 안전진단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100원도 채 안된다. 인건비도 안되는 비용으로 과연 과학적인 안전진단이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안전진단이 요식행위가 되었다는 것은 결국 재건축이 필요성보다는 유행병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건설교통부 관계자의 이 말 한마디는 서울 수도권의 집값 급등과 전세난의 원인을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쏟아져 나오는 재건축 때문에 문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올 상반기 서울에서 주택 매매가와 전세금이 폭등한 곳도 모두 재건축 아파트가 밀집된 지역이었다. 결국 부동산 시장의 불안을 진정시키려면 무엇보다 비정상적인 재건축부터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글 싣는 순서▼
上-매매 잠잠…호가만 껑충
下-'재건축 유행병' 잡아야
▽집값 상승의 주범〓올 상반기에 서울의 재건축 대상 아파트 매매가는 올 들어 22.4%나 올랐다. 이는 같은 기간의 일반 아파트 매매가 상승률의 5배가 넘는 수준.
전세금도 마찬가지다. 재건축할 아파트에서 철거를 앞두고 전세 수요가 쏟아지면서 주변 전세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대표적인 예가 8월 이주를 앞둔 강남구 대치주공아파트. 불과 552가구를 재건축하는데 주변 전세금이 두 달새 20%나 올랐다.
문제는 앞으로 이같은 상황이 고질화할 우려가 높다는 것. 부동산114에 따르면 서울에서 재건축을 추진중인 아파트는 132개 단지, 12만4687가구에 이른다. 이는 지난 해 서울 동시분양을 통해 분양된 아파트 2만4597가구의 5배가 넘는 물량이다.
▽부동산 거래 시장도 왜곡〓최근에는 재건축이 집값 이상 급등이라는 부작용 외에도 부동산시장을 교란하면서 사회 혼란마저 가져오고 있다.
강남구 D아파트 재건축 조합은 최근 조합원들에게 “빈 집이 많을수록 재건축 사업 승인을 빨리 받을 수 있다”는 안내문을 보냈다. 조기 재건축으로 사업성을 높이기 위해 세입자를 내보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
조합과 재건축 시공사가 집 값을 올리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다. 건설업체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고 일부 조합과 중개업자는 높은 수익이 예상된다며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이 때문에 조합과 시공업체가 짜고 집 값을 올려 그 차익을 조합운영비로 사용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다.
▽형식적인 재건축 안전진단〓재건축 여부를 결정하는 건물 안전진단이 부실하게 진행된 경우가 적잖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일부에선 최소 경비에도 못 미치는 사업비로 안전진단에 나서면서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에서 추진되는 재건축 단지로 규모가 가장 큰 송파구 가락시영아파트(총 6600가구)이다. 지난해 재건축해도 좋다는 안전진단 결과를 받은 이 아파트가 안전 진단비로 책정한 돈은 50만원. 일반적으로 적정 안전진단 비용은 가구당 50만원 정도인데 반해 강동 시영의 경우 75원에 불과했다.
연립주택 재건축이 활발한 서울 강동구의 경우 안전진단비에 100만원을 쓴 곳이 손에 꼽을 정도며, 특히 올 5월에 재건축 승인이 난 성내동 보민연립(18가구)의 경우 안전진단에 15만원을 투입해 서울에서 가장 싸게 안전진단을 끝낸 곳이 됐다.
건교부의 한창석 주거환경팀장은 “교통비나 최소 인력 운영비도 되지 않는 비용으로 안전진단을 끝낸 곳이 수백 곳”이라며 “제대로 안전진단을 했는지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jsonhng@donga.com
▼주택산업硏 진단과 대책▼
‘바탕에 깔린 원인은 주택 공급 부족이다.’
최근 서울 수도권에서 과열 기미를 보이고 있는 주택매매 및 전세금 상승에 대해 주택 및 택지 공급을 늘리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다. 저금리에 따른 투자 자금의 부동산 시장 유입, 재개발에 따른 이전 수요 등이 기폭제가 되긴 했으나 주택의 수급 불균형이 결국 부동산 시장 불안의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주택산업연구원은 최근 ‘수도권 주택시장 동향과 대책’이란 보고서에서 “외환위기 이후 구매력이 떨어지고 주택건설업체들이 부도를 겪으면서 98년부터 지난해까지 주택 공급이 격감했다”고 지적했다. 주택 200만 가구 건설이 본궤도에 오른 90년부터 97년까지는 매년 63만6000가구가 공급됐으나 98년부터 지난해까지는 40%가량 줄어든 매년 평균 38만1000가구가 공급되었다는 것.
연구원은 “지난해말 현재 서울과 수도권의 주택보급률은 각각 71.7%와 84.8%에 불과해 가격이 오를 여지가 많은 등 시장 가격이 불안정하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의 이동성(李東晟)원장은 “주택 공급이 10% 줄어들면 2.56%의 가격 상승 요인이 있다”면서 “최근 몇 년간 주택 공급이 줄어든데다 주택 가격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정보급률(110%)에 비해 수도권의 경우 주택보급률이 턱없이 낮아 매매가 및 전세금 상승의 배경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원 장성수(張成洙) 연구실장은 “주택 수요가 급증해 매년 약 50만가구를 공급해도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는데는 15년 가량이 걸린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서울 등 수도권의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도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은 충분한 택지와 이에 따른 도로 등 사회기반시설이 공급되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정부가 수도권 주택 보급에 대한 거시적인 정책을 효과적으로 이끌지 못한 것.
수도권에서는 90∼94년에 연평균 1575만㎡의 공공택지가 공급됐으나 95∼99년에는 연평균 공급량이 1270만㎡로 약 20%가량 줄었다. 특히 99년에는 741만㎡로 90년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또 95년 이후 2000년 4월까지 경기도에서 공급된 주택 72만여가구중 30% 가량은 준농림지역에 지어졌다. 그러나 난개발 논란으로 지난해 ‘준농림지의 택지공급 중단’ 결정이 내려지면서 한해 약 7만가구를 지을 수 있는 택지가 없어졌다. 서울은 과밀화 방지를 위해 용적률을 강화해 재개발지 외에는 택지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건설교통부 최재덕(崔在德) 주택도시국장은 “장기적으로 택지를 늘리지 못하면 주택 공급 부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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