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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포럼]김영진/對日 강경책 득될것 없다

입력 | 2001-08-02 18:26:00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관한 정부의 대응을 보면 국가이익 개념의 부재와 외교기능의 마비를 엿볼 수 있다. 재수정 요구의 당위성이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발표한 조치들은 왜곡된 역사교과서의 재수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효성도 없고 한국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서 국익에 합치하는 현명한 정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선 목적과 수단의 불균형이 심하다. 재수정 요구는 장기적인 노력을 요하는 과제이다. 그런 과제를 끝까지 달성하겠다고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천명함으로써 한국 정부에 대한 평판과 외교 역량을 그 정책의 성공과 연계시켜 놓았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무기한 많은 외교적 노력과 자원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실패할 경우 한국 외교 이익에 미칠 손상을 감수할 모양이다.

이미 발표된 정부 조치들은 더욱 강경한 조치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추가 문화개방이나 교사 학생 교류를 중단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고립시키겠다고 단언하며 정치 외교 안보면에서 협력을 동결하겠다는 자세다. 대응정책의 단계적 강경화는 일본의 대응 보복조치 등으로 이어져 한국의 국가이익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인데 그것도 불사한다는 것인지 정부에 묻고 싶다. 교과서 수정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어느 수준의 불이익을 각오할 것인지를 냉정히 판단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의 방침에 따라 정부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강경책을 공표하는 상황은 정부에 기대되는 냉철하고도 체계적인 외교정책 결정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문제는 국내 정치적 고려와 대북정책 제일주의에 몰두하는 대통령 측근들의 사고방식, 가치관, 판단기준이 정상적인 외교 기능을 압박해 마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교과서 문제에 강경 대응하는 것에 대해 특수한 한일 양국간의 역사적 관계, 교과서 문제의 본질적 성격, 한국의 국민정서, 한국 지도자가 느낀다는 배신감,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심각한 우려 등 다양한 해설이 있다. 이 밖에 두 가지 해설을 소개하겠다.

국제정치학에서 원용되는 여러 접근법과 개념 중에 정신분석학적 개념인 ‘대상대체(對象代替·displacement)’라는 것이 있다. 한국의 현황에 적용해 본다면 국내에 축적돼 있는 정부에 대한 불만 분노 비판을 일본이란 대체대상으로 전환해 해소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어느 정도 이를 의식하고 대일정책을 추진하고 있는지 모르나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어느 정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해설은 현 정권의 최우선 정책은 햇볕정책이며 다른 모든 대내외 정책은 대북정책-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실현-에 종속되며 그 목적 달성에 기여하느냐가 정책 결정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대일 강경정책이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의 비판을 전환 내지 약화시키고 북한 및 중국과의 실질적인 대일 연대투쟁 자세를 선명하게 함으로써 김 위원장의 답방을 위한 분위기 조성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고려가 작용했다면 정부의 오판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한국이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 ‘자주성’을 과시하는 것을 이념적으로나 원칙적으로는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한국에 북한이 어느 정도의 매력을 느낄지 의문이다.

정부가 국내의 강경론에 밀려 미온적 태도를 버리고 강경 포즈를 잡았다는 설도 있다. 사실 교과서 문제가 이렇게까지 전개되리라고는 양국 정부 모두 예기치 못했고 고위급에서의 정치적 해결책 모색의 기회도 놓쳤다. 새롭게 구축한 한일간 화해 협력의 기본틀이 붕괴되는 방향으로 표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조기 수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양국 정부 모두 적절한 수습방안이 없고 가까운 장래에 타결책을 찾을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문제의 교과서 채택 규모가 한정된 것이 되더라도 그것은 내용 수정이란 목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10월에 있을 한일 정상의 상봉 기회를 목표로 타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을 기대하는 식자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기대도 남쿠릴열도 꽁치 조업 문제의 원만한 해결과 일본 총리의 8·15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야기할 문제들이 통제불능 상황으로 악화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이다.

김영진(미국 조지워싱턴대 명예교수·일본 게이오대 객원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