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옷·가구·화장품 등 ‘자연주의 패션’ 급부상 … 일상 탈출 꿈꾸는 현대인의 ‘도피행동’
"순면 속옷을 입으시죠? 순한 화장품을 쓰시는군요. 그럼 생리대도 순한 걸 쓰셔야죠.” 부드러운 음악을 배경으로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의 모델이 편안하게 자연 속을 거니는 이 CF는 특이하게도(?) 생리대 광고였다. ‘순면 감촉의 좋은 느낌’을 내세운 이 국산 생리대는 CF 방영 이후 매출이 크게 올랐다.
‘생리대에도 순면을’이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근 들어 이렇게 ‘천연 소재’ ‘순식물성’ 같은 점을 강조한 제품이 크게 늘었다. 일체의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퇴비로 재배한 유기농산물이 비싼 값에 팔려나가 우리 식탁에서 환영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패션과 뷰티, 인테리어 전반에서 친환경적·자연적인 생태주의 스타일(ecology style)이 각광 받는 것이다.
리모델링이나 가구 리폼으로 집안 분위기를 바꾸려는 주부들은 체리목처럼 짙은 색상의 바닥과 가구를 옅은 색상의 벚나무나 백송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이전보다 좀더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추구하기 때문. 침대나 주방 가구까지 자연 친화적인 느낌의 목재를 주소재로 사용하는 것은 이런 경향의 반영이다.
◇ 편안함과 자연스러움 추구
오두막집의 난로 옆에서 한가로이 책을 읽다 잠드는 안락한 생활. 이는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한결같은 바람이 아닐까.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끝도 없는 일 때문에 극심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지만,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이 인테리어를 바꾸고 친자연적 화장품을 사고 옷을 입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일종의 ‘도피행동’이라고 한다.
이처럼 도시의 중압감에서 멀어져 자연 속에서 재충전하고픈 사람의 바람은 올 가을 ‘자연주의 패션’의 부상을 예고하고 있다. 색상 면에서는 그린·카키·브라운 등 땅과 식물을 닮은 컬러가 많이 나오고 있다. 나일론·스펀덱스 등 합성섬유의 소비가 줄고 면·마·울 등 천연 소재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요란한 장식이나 무늬를 배제하고 피부처럼 부드러운 양가죽과 캐시미어 등 고급 소재만으로 럭셔리한 느낌을 살린 의상도 눈에 많이 띈다.
이에 따라 영국풍의 전통적인 클래식 패션이 다시 인기를 끌고, 소박하지만 안락한 느낌을 주는 내추럴 패션에 사람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트래디셔널 웨어의 대표적 브랜드인 ‘랄프 로렌’ ‘빈폴’ 같은 고가 브랜드와 ‘지오다노’ 같은 중저가 이지(easy) 캐주얼 브랜드를 찾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바로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이다.
제일모직 빈폴의 디자이너 이경수씨의 말. “우리는 3년 전부터 벤처 기업인들의 패션을 연구해 왔다. 이들은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정장에 넥타이 차림을 거부하고 캐주얼한 차림을 고수하고 있다. 정장과 캐주얼을 믹스한 빈폴의 일명 ‘빌 게이츠룩’은 1년 새 매출이 35%나 늘었다.”
‘자연 친화적 패션’을 강조하는 이 회사의 전략은 소재나 디자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씨는 “염료 선택도 환경을 덜 오염시키고 피부에 해가 없는 제품인지 먼저 고려한다. 자연적인 컬러를 추구하기 위해 가을이면 낙엽 색깔 옷을 만들고, 노란색 안에 보라색이 조금 섞인 팬지꽃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기도 한다.”
대담한 디자인과 화려한 장식, 요란한 프린트물의 유행이 새로운 세기에 대한 낙관론을 반영한 것이라면, 이제는 자연주의 패션이 부상한다. 사이버 시대를 상징한 실버 컬러와 광택 소재가 사라진 자리를 부드럽고 따뜻한 ‘핸드 메이드’(수공예)풍 패션이 대신하고 있다.
“패션에서 식물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과 수공예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디자인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더드의 추세에도 사람은 지속적으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삼성패션연구소 서정미 수석연구원은 정신적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의 욕구와 함께 최근 급증한 건강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업체들의 ‘자연주의 마케팅’을 가속화한다고 설명한다.
◇ 자연 마케팅은 기업 생존 키워드
화장품 업계에서도 가장 큰 화두는 ‘자연’과 ‘환경’이다. 원료에서 화학적 성분을 배제하고 유기농 원료를 써서 순식물성 성분임을 표방하는 자연주의 화장품들이 폭발적 인기를 누리는 것이다. 아베다·클라란스·오리진스 같은 브랜드들은 ‘자연과 정신의 교감’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워 짧은 시간에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이들 화장품은 환경보호를 위해 재활용 용기를 쓰고 코팅하지 않은 재생용지를 포장지로 쓴다. 스킨케어와 메이크업 제품뿐 아니라 향기치료법(아로마 테라피)에 쓰이는 제품도 판매하는데, 식물의 뿌리·줄기·꽃 등에서 추출한 식물 에센스 제품들이 자연주의 신봉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아베다 홍보팀의 김주연씨는 “우리는 화장품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을 판다”고 말한다. “제품 포장을 위해 옥수수 전분 스티로폼을 쓰고, 헤어스프레이에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 가스 대신 공기 압축을 이용한 분사방식을 쓴다. 판매액의 일부를 환경단체에 기부하는 등의 활동이 소비자들에게 회사와 제품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너무 빨리 변하는 현대사회의 속도와 비인간적인 컴퓨터 문화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의식주 전반에서 이런 자연주의적 경향은 더 강해질 듯하다. 순면으로 만든 옷을 입고 녹차 성분의 화장품을 바르는 것이 자연친화적인 생활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확산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 주간동아 296호 2001.8.9일자·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 외국도 자연주의 패션 물결
머리부터 발 끝까지 … 전 지구적 유행
지난 7월15일자 ‘뉴욕타임스’ 역시 “친환경적 유기적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패션·뷰티업체 마케팅 담당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다”고 전한다. 이런 경향은 전 지구적인 유행인 것.
사진 속 모델은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자연주의 제품으로 치장하고 등장했다. 순식물성 성분의 헤어스프레이와 스킨케어 제품을 썼으며, 브라질 나무의 수액으로 광을 낸 가방, 자연적인 염료로 염색한 바지, 조개 성분 립스틱, 순면 티셔츠와 삼베 코트 등…. 헤르메스, 엠포리오 아르마니, 켈리 등의 명품 브랜드들도 자연주의 패션의 유행을 주도한다.
그렇다면 이런 제품들의 시장 크기는 얼마나 될까. 작년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80∼90%가 재활용이나 물·에너지 절약과 같은 단순한 환경 의식적 행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73%는 환경 친화적인 제품을 구입한 경험이 있었다. 유기농법을 쓴 자연식품의 판매 역시 해마다 20%의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소비자들은 갈수록 더 많은 환경친화 상품을 원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의 철학은 곧 ‘좋은 마음씨’ ‘자선’의 의미와도 연결된다. 소비자들은 친환경적·친자연적인 제품을 구매하면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열성적인 소비자가 될 수 있다. 자연적인 제품들이 앞으로 더 큰 유행이 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