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3월 1일에 있었던 일
미년(1919년) 2월 하순 어느 날, 어스름이 깔리는 서울 안국동 사거리 근처에 한 사내가 땅 밑을 바라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이었다.
그는 발 밑으로 들려오는 어떤 기계 소리를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옆 건물인 보성사(普成社)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천도교에 소속된 인쇄소였다. 불빛은 없었다. 그가 닫힌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니 안은 불빛이 환했고 윤전기에서는 무엇인가 인쇄 중이었다. 빼내어 보니 ‘독립선언서’였다. 인쇄소를 급습당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33인의 한 사람)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신철은 선언서 한 장을 챙겨들고 말없이 인쇄소를 나갔다.
▼조선인 日警 묵인으로 성사▼
이종일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최린은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최린은 신철에게 민족을 위해 며칠 동안만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때 최린은 그에게 5000원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당시 쌀 한 가마니의 값이 41원이었음)
일본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갔다고 되어 있다.
최린의 집에서 나온 신철이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3·1운동의 모의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만세 운동 지도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철은 현장을 피해 만주로 출장을 떠났다. 만세 운동이 진압될 무렵인 5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온 신철은 정보를 갖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경성헌병대에서 투옥 중 곧 자살했다.(매일신보 1919년 5월 22일자)
▼3월3일 거사 1일로 앞당겨▼
본래 ‘독립선언서’는 만해 한용운이 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고 검토 과정에서 문장이 너무 격렬하다는 이유로 유보되었고, 최남선에게 다시 쓰게 했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경 지도부는 최종 점검을 위해 서울 재동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그들은 우선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은 약속 장소인 파고다공원으로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민족 대표들은 어디에서 모일 것인가? 여러 얘기 끝에 당시 장안의 제일 가는 요정인 태화관에서 모이기로 했다. 이 요정은 한말에 궁내부 의전국장을 지낸 안순환이 운영하던 곳으로 요정으로 문을 열기 전에는 이완용의 별장이었다.
3월 1일 오후 2시(‘3·1절 노래’에 ‘기미년 3월 1일 정오’라고 가사를 지은 것은 정인보의 착오임), 약속대로 젊은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였으나 민족 대표들은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당황했지만 곧 경신학교 출신인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민족 대표의 불참에 대해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은 격노해 민족 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그 때가 오후 3시였다.
그렇다면 이 시각에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2시에 모이기로 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모인 것은 오후 3시였으며 숫자는 29인이었다.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4명의 목사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4인은 태화관 모임 불참▼
음식상이 나오고 주산월을 비롯한 기생들이 시중을 들었다. 당시 명월관 기생 이난향의 ‘회고록’(중앙일보 1971년 1월 15일자 ‘남기고싶은 이야기: 명월관 편’)에 의하면, 산월은 손병희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사이였다고 한다.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배포 받아 읽어본 후 한용운이 일어나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된 것을 경하하며, 더한층 노력하자”는 연설을 한 다음 그의 선창으로 만세 삼창을 했다. 이 때가 오후 4시였다.
▼분노한 학생들 대표에 항의▼
이 무렵 강기덕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들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쳐 민족 대표들이 파고다공원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며 대들었다. 이에 당대의 논객이었던 박희도가 “무저항 비폭력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방침에 따라 불가피하게 불참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곧 이어 경찰이 들이닥쳐 민족 대표 29인을 체포해 남산의 경무총감부로 연행했다.
종래 기록에 의하면, 경찰이 태화관으로 쳐들어 온 것은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 주인 안순환으로 하여금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집회를 통고하도록 했고, 이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 민족 대표를 연행했다고 되어 있으나(원호처, ‘한국독립운동사’ 2권, 102쪽) 출처가 없다.
아마도 이 기록은 이난향의 회고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이 전화 통고설은 어떤 1차 사료로써도 확인되지 않는다. 전화를 정확히 몇 시에 걸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화를 건 것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혈안이 되어 민족 대표의 소재를 찾기 위해 2시간이나 헤맸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갑성의 경성지방법원 조서(4월 28일자)에 의하면, 그는 3월 1일 집을 나서면서 자기 집에서 일하는 서영환을 시켜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독립청원서’를 전하도록 하고 집합 장소를 태화관으로 기록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집에서 부리는 사람’이 조선 총독을 만나 문서를 전하러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자수’냐 ‘통고’냐, 아니면 ‘투항’이냐 하면서 한때 치열한 감정 싸움까지 번진 적이 있으나, 사실의 내막을 정확하게 알고 나면 그처럼 다툴 사안이 아니었다. 자수라 함은 ’범죄인‘이 체포되기 전에 사직 당국에 스스로 출두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 운동이 범죄는 아니므로 자수란 말은 온당치 않다. 통고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원초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투항이라는 용어는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더 이상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행위로서 이 또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맞지 않는 용어이다. 그냥 체포되어 간 것이다.
연행된 민족 대표들은 종로경찰서와 경무총감부, 그리고 경성지방법원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손병희는 “나는 한일합병에 대하여 별로 찬성이라든가 불찬성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손병희에 대한 경성지법 조서, 4월 10일자)
정춘수는 “나는 본래 한일 합병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정춘수에 대한 검사조서, 3월 21일자)
홍병기는 “총독부에 독립건의서를 제출하고 그 회답을 기다리면서 선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태화관에 갔다”고 대답했다.(홍병기에 대한 경찰조서, 3월 1일자)
▼한용운 끝까지 지조 지켜▼
한용운은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일관되게 독립 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양한묵은 심문 중 옥에서 순국했다.
오늘날 미국의 최고 지성의 한 사람인 노암 촘스키의 말을 빌리면,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 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쓸쓸해진다.”
3·1운동 지도부의 전략과 당일의 처사를 볼 때 우리는 꼭 같은 심정을 느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3·1 운동을 영웅사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1운동을 민중 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참된 위대함과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의 주역에는 이름 없는 사람이 더 많다. 역사의 조타수(操舵手)는 당대의 지식인들이지만, 역사의 추진 세력은 그 시대의 민중일 수밖에 없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