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35)에게는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있다. 1993년부터였으니 벌써 8년째다. 결정적인 순간이면 불쑥 튀어나와 박중훈을 바짝 긴장시키는 ‘녀석’.
지난해 ‘불후의 명작’을 개봉할 때도 그랬다. 18일 개봉하는 스릴러 ‘세이 예스’를 앞두고도 그 녀석은 분명 또 찾아올 것이다.
문제의 ‘녀석’은? 바로 ‘웃기는 박중훈’이다.
“코믹한 이미지를 벗는 게 쉽지는 않더군요. 배우가 하고 싶은 연기와 관객이 보고 싶은 배우의 이미지가 늘 일치하는 것만도 아니고…. 하지만 영화 ‘세이 예스’에서 살인마를 연기하면서 신선한 경험이었고, 관객들도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배우 박중훈에게 ‘웃기는 박중훈’은 가장 큰 라이벌이다. ‘칠수와 만수’(88년) ‘우묵배미의 사랑’(90년) 등 진지한 영화에서도 빛나는 연기를 보여준 그였지만 93년 ‘투캅스’ 이후 관객들에게 박중훈은 오로지 코믹배우였다. ‘마누라 죽이기’(94년) ‘투캅스2’(96년) ‘할렐루야’(97년)를 통해 이런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지난해 그는 ‘불후의 명작’에서 모처럼 진지한 연기를 펼쳤다. 그는 “촬영하면서 뿌듯했고 연기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지만, 관객들은 “어, 박중훈이 안 웃기네” 하며 영화를 외면했다.
배우에게 ‘변신’이란 평생 끌어안아야 할 화두이기 때문일까. 그는 ‘세이 예스’로 또다시 ‘웃기는 박중훈’에게 도전장을 냈다.
‘세이 예스’에서 그는 잔인한 연쇄 살인마로 나온다. ‘손톱’ ‘올가미’ 등 한국 스릴러의 개척자로 꼽히는 김성홍 감독의 작품이다.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여행을 떠난 신혼부부 윤희(추상미)와 정현(김주혁)앞에 낮선 남자가 나타난다. 정현은 무례한 이 남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경찰에 붙잡히고 남자는 합의조건으로 사흘 간의 동반여행을 제안한다….
‘세이 예스’라는 제목은 살인마가 남편에게서 듣고자 하는 대답. 살인마는 남편의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리며 “네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아내를 죽여달라고 해. 너 대신 아내를 죽여줄까?”하고 묻는다.
살인마가 되기 위해 박중훈은 눈빛연기에 신경을 썼다. 행복한 신혼부부에게 이유 없이 다가가는 광기 어린 눈빛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촬영 내내 회색 콘택트렌즈를 꼈다.
그는 “만약 동남아에서 ‘세이 예스’가 상영된다면, 그쪽의 관객들은 박중훈을 코믹배우가 아닌 스릴러 배우로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연기에 대한 만족감의 표현이면서도, 그만큼 한국에서는 기존 이미지를 깨는 게 쉽지 않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박중훈은 재일교포인 아내의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온 뒤 한동안 쉴 생각이다. “요즘 병원을 다섯 군데나 다닌다”는 그는 이에 교정기를 끼고 있었다. 스트레스성 과로로 잇몸이 침식돼 치료받는 중이라고 했다. 올 상반기 한국 배우 최초로 할리우드 영화‘찰리의 진실’에 출연하면서 너무 힘들었던 탓이다.
‘양들의 침묵’의 조나단 드미 감독이 연출하고 마크 월버그, 팀 로빈스 등 쟁쟁한 스타들과 함께 찍은 ‘찰리의 진실’은 내년 초 개봉될 예정이다. 그가 영화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 정도로 꽤 큰 조연이다.
그는 드미 감독으로부터 차기작인 로맨틱코미디에 주연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아놓고 있으며 미국 워너 측으로부터는 마크 월버그와 버디무비(남자배우 두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찍자는 제의도 받아둔 상태다.
할리우드의 스타 감독, 스타 배우와 함께 영화를 찍고 돌아온 만큼 충무로에서 그의 ‘몸값’이 얼마나 뛸 지 궁금했다. ‘찰리의 진실’의 출연료로 그는 충무로 최고 개런티(2억5000만원)를 훨씬 웃도는 32만5000만 달러(약 4억원)를 받았다.
“예전에 다른 배우들을 보면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후 몸값을 올리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몸값은 철저히 흥행과 시장성을 따라야죠. 상 한번 탔다고, 할리우드에 진출했다고 몸값이 오르는 건 말이 안되지요.”
명쾌한 ‘할리우드식’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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