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문식 전 국회의장
《일본 제국주의가 벌인 ‘대동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0월 어느 날 이른 새벽. 경성제국대 예과 학생 채문식(蔡汶植)의 하숙집에는 일본 형사 2명이 장화를 신은 채 들이닥쳤다. 그는 함흥형무소 차가운 바닥에 내던져졌다. 야만적인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이 이어졌다. 그는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좌익운동을 하는 친구를 둔 것이 죄였다. 형무소에서 나와 보호감찰소에서 숙식하며 학업을 계속하던 그에게도 광복의 날은 왔다. 이때부터 약 50년간 한국 현대사의 거센 소용돌이는 한번도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광복 직후 그는 경성대학 대표로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신문기자가 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개원하는 현장을 취재하기도 했다. 23세란 ‘새파란’ 나이에 아버지 친구들을 면장으로 거느린 청년군수를 했고 내무부 재정과장도 지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에서는 야당대변인을 했다. 신군부가 들어서자 20년 야당생활을 접고 국가보위입법회의 부의장으로 변신했다. 5공화국 정권에서 국회의장, 6공화국 정권에서 집권당의 대표위원도 지냈다. 보수와 혁신, 그 대결의 목소리가 갈수록 날이 서는 요즘, ‘대결-파국-해빙-또 대결’이 이어지는 상황을 관전하는 데 이골이 났을 그는 무얼 생각할까.》
첫 번째 인터뷰 요청은 거절이었다. “이미 흘러간 사람이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한번 더 전화를 걸었다. “할 얘기 없는데…. 그래도 와야겠다면 오세요” 마지 못한 응낙이었다.
인터뷰를 하는 3시간동안 그는 한갑 가까이 담배를 피웠다. 하루 평균 담배 두갑, 약주도 수시로 하고 운동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잠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그에게 건강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다. 92년 대퇴골의 관절뼈를 20cm 가량 잘라내는수술을 받은 뒤 ‘최소한 3개월은 담배를 끊으라’는 의사의 경고도 수술 다음날 바로 무시해버린 그였다. 그런데도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하는 유일한 비결은 가급적 세상 일을 잊고 사는 것.
“그래서 신문도 안 보려고 하는데 한평생 습관이라 일어나면 신문부터 찾게 돼. TV뉴스는 요즘 재미가 없어져 잘 안 봐요. 세상 일을 외면하려 해도 요즘 벌어지는 일들이 자꾸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어요. 조금만 젊었더라면 한번 소리를 질러볼 걸 하는 생각도 가끔 합니다.”
최근 그의 마음을 가장 어지럽혔던 뉴스는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발표한 공동선언문중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대목.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김위원장이 6·15 남북정상회담 때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같다는 얘기를 했었다’고 하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북한이 저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데도 정부가 김정일 서울 답방에 매달리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미전향 장기수 송환도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시혜였다고 생각합니다. 납북된 2대 제헌의원들중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분들이 아직 많습니다. 상호주의 시각에서 본다면 당연히 짚고 넘어갔어야 할 문제입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대북문제를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모든 주장을 반통일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됐어요.”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그의 얼굴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최근 보수-혁신간 대결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해방 직후의 좌우 대결과 같은 혼란상이 재연되지 않을까나는 걱정이 앞섭니다”
안보 우방인 미국과 일본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부추키는 사회분위기도 심각한 수준이라는 게 그의 주장. “교과서 왜곡 문제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어요. 대응이 늦었어요. 주미대사나 주일대사는 총리나 외무부장관을 지낸 거물급이 나가는 것이 관례인데 이 정권은 당초 중량감이 떨어지는 인사를 미국과 일본 대사로 보냈어요.”
채 전의장은 “최근 언론사태도 궁극적으로 자유언론을 위축시키려는 고등수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이 앞선다”며 “시대가 어떻게 바뀌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자유언론의 3대 원칙은 훼손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채 전의장은 “김대통령이 광복절 축사에서 분열을 극복하고 국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말씀을 하시지 않겠느냐”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은퇴한 노(老)정객의 건강을 위해 현재의 정치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서둘러 접었다. 현대사의 빛과 어두움이 녹아있는 그의 인생역정에 관해 물었다. 좌우와 여야를 넘나들며 항상 역사의 한복판에 항상 서 있었던 원인, 그의 정치철학 등이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처음부터 예상을 빗나갔다.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기는 했지만 핵심과 주류(主流)에서는 항상 비켜서 있었어요. 집권당 대표도 아무 실권도 없는 명예직 감투였습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보스가 되려면 앞뒤 돌아보지 않는 과감함과 돈이 있어야 합니다. 신중함은 걸림돌이 될 때가 오히려 많습니다. 그런데 나는 돈을 모을 줄 몰랐고 항상 망설였습니다. 정치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도 어느 순간 멀찍이서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사독재 시절 ‘야당의원의 꽃’이라는 대변인을 했지만 주류인 ‘선명야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야당생활을 할 때는 한일회담 언론법파동 월남파병 3선개헌 유신체제 등장 등의 이슈로 야당의원들의 길거리 데모와 농성 등이 끊일 새 없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런 자리를 피하려 했어요. 나는 박정희대통령 집권하에서 3선개헌과 유신반대 데모를 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박대통령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빈곤을 없애고 공업입국을 위해 당차게 밀고나가는 그 신념이 인상 깊었습니다. 당시는 야당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정부 여당은 절대적으로 나쁘다고 믿는 바탕 위에서 선명하게 투쟁해야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야당답지 않은 야당인으로 서 있었습니다. 흑백논리가 판치는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자신의 행동을 회의하고 남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것은 큰 결점이었습니다.”
정치철학에 대해서도 여느 정치인처럼 ‘조국과 민족’을 앞세운 답변이 나올 것으로 짐작했으나 아니었다.
“거창한 정치철학이나 좌우명은 없었어요. 좌우명을 억지로 대라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뜻의 ‘종심소욕(從心所欲)’정도랄까. 내 인생을 이끌어온 것은 사소한 작은 계기나 시류(時流)를 거스르고픈, 마음 한구석에 항상 잠재해있던 ‘반동기질’이었어요”
경성제대 재학중 좌익 서적을 탐독했던 이유도 단지 좌익 서적이 금기였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우익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가 발단이었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을 만나러 가던 중 시간이 남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 집에 먼저 들렀다. 인촌선생은 지금도 채 전의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인촌선생과의 인연은 그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중앙고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한국말을 쓸 수 있던 학교였습니다. 다른 학교에서는 한국어를 한마디라도 사용하면 퇴학을 당하던 시절입니다. 인촌선생이라는 큰 그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교사가 체포돼 가면 인촌 선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내왔습니다. 일제의 온갖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민족정신을 키운 인촌 선생의 위대함은 만주나 러시아에서 총을 들고 일제에 맞섰던 독립투사들에 못지 않습니다.”
청년 채문식을 앞에 앉힌 인촌선생은 몽양이 사람이 너무 좋아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할 것이라며 고하(古下) 송진우(宋鎭宇)선생의 지도를 받으라고 그에게 충고했다. 좌익이 될 뻔한 그의 인생은 이렇게 해서 180도 달라졌다.
채 전의장이 정치에 입문한 것은 공직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됐다. 3번 연거푸 낙선의 쓴 잔을 마셨지만 오기가 발동해 정치활동에 더 깊숙이 뛰어들었다.
야당 생활을 시작한 것은 5·16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모두가 공화당 공천에 목을 늘일 때 그 흐름에 거꾸로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유진오(兪鎭午)선생 아래서 민정 이양을 위한 재건국민운동본부 계몽부장을 지냈던 그는 공화당 공천 제의를 받았던 터였다.
그는 박대통령이 사망하고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체질에 맞지 않은’ 야당 생활을 접었다. 그 뒤 ‘벼슬운’은 따랐지만 야당 때와 마찬가지로 핵심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86년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개헌을 추진하다 4·13 호헌조치에 이어 6·29 선언을 맞았다. 그는 “6·29 전날까지도 그런 내용이 발표될 줄은 전혀 감도 잡지못했다”고 회고했다.
6공화국 당시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김영삼(金泳三) 당시 민자당 최고위원을 후계자로 낙점했을 때도 그는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가 정치를 그만둔 것도 정치인답지 않게 선거판이 싫었기 때문. “비록 한참 뒤 그만 두기는 했지만 12대 총선을 치르면서 길거리에서 표를 구걸하다시피 하는데 참을 수 없는 염증을 느꼈다”는 것이다.
야당뿐 아니라 여당도 그에게는 체질상 안 맞았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치에 뛰어든 데 대해 후회는 없는지’ 질문을 던져봤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얼 하겠습니다.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정치를 하지 않고 공부를 해 교수가 됐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끔해요.” 정치란 무엇일까. “수십년을 하고도 한마디로 답할 수 없는 것이 정치요” 그의 목소리는 긴 여운을 남겼다.
iam@donga.com
▼채문식씨는…▼
△1925년 경북 문경 출생
△학력
-1943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194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1958년 미국 아메리칸대 대학원 수학
-1983년 명지대학교 명예행정학박사
-1999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
△주요경력(모두 전직)
-1949년 경북 문경군수
-1958년 내무부 재정과장
-1960년 영남일보 논설위원
-1961년 민국일보 도쿄특파원
-1961년 명지대 교수
-1971년 8대 국회의원(전국구, 신민당)
-1973년 9대 국회의원(문경·예천, 신민당)
-1978년 10대 국회의원(〃)
-1980년 입법회의 부의장
-1981년 11대 국회의원(문경·예천, 민정당)
국회부의장
-1983년 국회의장
-1985년 12대 국회의원(문경·예천, 민정당)
-1986년 국회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
-1988년 민정당 대표위원
-1988년 13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정→민자당)
-1989년 민정당상임고문
-1990년 민자당전당대회 의장
-1992년 국민당대표최고위원
-1995년 고려중앙학원이사장
-1999년 헌정회회장
△호〓우치(又癡)
△취미〓바둑, 마작
△종교〓없음
△감명깊게 읽은 책〓논어
△존경하는 인물〓인촌 김성수
▼92년 민자당 대선후보 뒷얘기▼
채문식 전국회의장은 인터뷰 도중 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결정 과정에 얽힌 비화 한토막을 털어놨다.
채 전의장은 당시 김영삼 최고의원에 대항, 민정계 단일후보를 내기 위해 박태준(朴泰俊) 이종찬(李鍾찬) 박철언(朴哲彦) 양창식(梁昶植) 이한동(李漢東) 박준병(朴俊炳) 심명보(沈明輔)씨 등과 ‘7인 위원회’를 가동하고 있었다. 채 전국회의장의 회고담을 그대로 옮긴다.
민정계가 후보로 내세우기로 당초 결정한 인물은 박태준씨였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이들에게 ‘YS에게는 대통을 넘겨주지 않는다. 민정계가 적당한 후보감을 내면 밀겠다’는 뜻을 간접 경로로 전달해왔다.
박태준씨는 이에 따라 취약지역으로 여겨지던 호남 지구당위원장들에게 상당한 자금을 뿌리는 등 의욕을 보였다.
그러던 중 분위기가 YS쪽으로 돌아간다는 정보가 날아 들었다. 채 전의장 등은 노전대통령이 어려워하는 모 원로정치인에게 청와대를 직접 찾아가 ‘노심(盧心)’을 알아볼 것을 부탁했다. 이 인사는 청와대에서 노전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는 차안에서 채 전의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노대통령이 “내 마음은 박태준으로 굳어있다”고 말했다는 것이 그의 전언.
같은 날 박태준씨는 안기부장으로부터 “내일 아침이나 함께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날 안기부장은 조찬자리에 큰 보따리를 들고 나와 박태준씨에게 보여줬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 줄 아느냐. 포항제철 재직기간 동안의 비위에 관한 자료다.” 후보 경선에 나서지 말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박태준씨는 중도하차했고 이종찬씨가 나섰다가 탈당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