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태어나 이 강산에 국어선생이 되어….’
국어만큼 신세 처량한 과목이 또 있을까. 말로만 ‘국 영 수’지, 국어시간에 수학이나 영어 공부하는 놈은 많아도 참고서 한 권 주겠다고 선언해도 영어 수학시간에 국어 공부하다 걸린 놈은 아직 없다.
어찌 된 경우인지 ‘would have+p.p’(가정법 과거완료)라는 끔찍한 영문법은 찍소리 없이 외우는 놈들이 ‘객체존대, 상대존대’ 운운하면 “어, 그거 수능에도 안나오는 건데”라며 볼멘소리다. 어떻게 된 놈의 세상이 맞춤법 틀리면 “그럴 수도 있죠, 뭐” 하지만 영어철자 틀리면 “Oh, 창피!” 한다.
사실 국어란 과목은 열심히 배운다 해서 시험 잘 보고, 땡땡땡 논다해서 백지 내는 것도 아니다. 안 배워도 말 잘하고, 놀아도 글 잘 쓴다. 오히려 수업시간에 소설책, 만화책 보는 놈들이 백일장에선 ‘터억하니’ 상만 잘 탄다. 어쨌든 10년 넘게 국어를 가르쳐봤지만 그 오묘한 이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애들 역시 배우고도 몰라하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학창시절 난 국어가 꽤 재미있었다. 지금은 그냥 그렇지만, 그때는 ‘낭만’이란 게 있었던 것 같다. ‘세번째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한 피천득의 ‘인연’, 날 꼼짝없이 노총각으로 만든 알퐁스 도데의 ‘별’, 그리고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그 주옥 같은 글들이 다 사라지고 지금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들만 교과서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으니 애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아이들도 교과서 표지의 ‘국어’라는 글자를 획 몇 개, 글자 몇 개로 확 바꿔버린다.
‘국진이 어머니’ ‘꾹 참어’ ‘꿀엿’ ‘품어’ ‘꿇어’ ‘똥묵어’ ‘국 쳐먹어’ ‘장국영’ ‘굶어’ ‘북어’ ‘한(恨)국어’ ‘대한민국 얼씨구’….
그러나 아무리 ‘국어’가 ‘똥묵어’가 되더라도 어쩌겠는가. 우리 아이들의 화풀이(?)를 위해서라도 없어서는 안될 과목이니. ‘국진이 어머니’가 뭐라 하든 오늘처럼 가르치기 싫은 날은 그저 빈대떡이나, 아니지 옛날로 돌아가 그 시절 그때의 글이나 되살려 볼밖에.
“너희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있으면 한 번 써봐!”
-가출했는데 부모가 찾지도 않을 때.
-깡패한테 잡혔다. 돈 없다 그랬다. 그런데 바지 속에서 나오는 1만원짜리 지폐.
-된장국을 먹다가 고기 덩어리인 줄 알고 씹었는데 된장 덩어리일 때.
-코를 후비는데 후빌수록 더 들어가는 매끈매끈한 코딱지.
-종 치자마자 매점으로 달려가 줄 서서 기다리는데 바로 내 앞에서 외쳐대는 소리, “빵 떨어졌다!”
-자고나면뻗치는내 머리카락.
-졸려 죽겠는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쓰라고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전성호(41·휘문고 국어교사)ohyeah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