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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美, 한반도 4대국 분할 시도했다

입력 | 2001-08-10 18:38:00


한 나라의 운명을 돌아보노라면 회한이 많이 일어난다.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실은 역사학에서 부질없는 일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런 가상을 하는 일이 허다하게 많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분단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분단 자체가 회한이기는 하지만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분단선이 너무 남쪽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비극적이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만약 분단선이 조금만 더 북쪽으로 올라가 서울이 북한 야포(野砲)의 사정권에 들지 않았고, 38도선으로부터 서울이 1일 진입권에 들지 않았더라면 김일성은 그렇게 간단하게 개전을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영토 점령 포만감 젖어▼

미국이 한반도의 분할 점령을 결심한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점령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보 부족과 제국주의적 오만,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변호해 주던 중국의 쇠퇴, 종전 과정에서 미국이 소련의 국력과 역할을 과대 평가했다는 점, 일본열도를 차지한 데 대해 미국이 포만감에 젖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한반도 분할을 놓고 미국의 정책입안자들 사이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한국의 분단에 대해 맨 먼저 착안한 것은 미국의 전쟁성 작전국이었다. 작전국 요원들은 1945년 7월에 이미 한반도의 분할을 구상하고 구체적인 도상 작전에 들어갔다.

그 결과 소련은 원산을 제외한 함경남북도를, 영국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미국은 원산을 포함한 함경남도 일부와 강원도 경기도 충청북도 경상남북도를, 중국은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 그리고 제주도를 점령하도록 했다.

▼최초안 인천 부산 원산 美관할▼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미국의 분할 점령 지역 안에 서울 이외에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원산 부산 인천의 3대 항구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미국의 극동 정책이 가급적 대륙에의 상륙을 피하면서 해상권에 의해 극동을 장악해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한반도 분할 작업을 진행한 곳은 합동전쟁기획위원회였다. 이 기구는 미국은 서해안 북위 40도 10분(신의주)으로부터 직선으로 동쪽으로 그어 함흥을 연결하는 분할안을 구상했다.

이 분할안은 미국의 여러 분할안 중에서 가장 북쪽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40도 10분 선에서 분할선이 결정되었다면 한국 전쟁과 같은 비극은 피할 수도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북상해 군사적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군부의 반대에 부닥쳐 묵살됐다.

그 다음으로 한반도의 분할을 구상한 것이 합동전쟁기획위원회의 수정안이다. 이에 따르면, 소련은 나진 청진 원산에 주력 부대를 주둔시키고, 중국은 평양 일대에 주력 부대를 주둔시키며, 서울은 그 특수성을 고려해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분할안이 가지는 의미는 서울을 베를린식으로 분할함으로써 냉전 시대를 예고했다는 점과 미국은 서울의 절반을 소련에 양보할 만큼 한국의 의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또 그만큼 후했다는 사실이다.

▼베를린式 서울분할 계획도▼

한편 전쟁성 작전국은 한반도의 분할에 영국과 중국을 참여시키지 않고 소련과 미국의 양대 분할을 실시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 분할안은 서해 북위 38도 10분에서 시작해 동해안 37도 40분을 잇는 사선(斜線)이라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이 분할안은 군사 전략상 해주 개성과 서해 5도를 장악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판단 아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여러 가지의 분할안 중에서 하필이면 왜 가장 남단선인 38도선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었을까?

38도선을 확정한 것은 3성 조정위원회였다. 3성 조정위원회라 함은 전시 중 미국이 전쟁 수행에 관한 의견과 정보를 신속히 교환하고 전쟁 수행 방향을 최종적으로 결정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국무부, 전쟁성, 그리고 해군성의 요원들이 구성한 연석회의였다.

이 협의체는 전시 중에 필요했던 모임이었기 때문에 군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이 당시 3성 조정위원회의 전쟁성측 대표단에는 링컨 소장, 본스틸 대령, 그리고 러스크 중령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로즈 스칼라’(옥스퍼드대학 특대생)들이었다.

1945년 8월 11일 오전 2시, 3성 조정위원회의 전쟁성 측 수석 대표인 링컨 소장은 책상 위에 다리를 걸치고 ‘뉴욕 타임스’를 읽고 있었다.

그때 위원회 의장인 던으로부터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남진한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받은 링컨소장은 다시 본스틸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과 인천이 포함되는 선에서 남북을 분할해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수 있는 군사상의 분계선을 그으라고 지시했다.

본스틸 대령은 서가를 뒤졌으나 마땅한 조선의 지도를 찾을 수 없어 고민하던 중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에서 만든 벽걸이 지도를 발견해내고 30분 동안 궁리한 끝에 푸른 잉크로 서울과 인천이 포함되는 38도선을 그어 링컨 소장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허둥대며 분할선을 그려 링컨 소장에게 보고했고, 이 분할안은 합참과 3성 조정위원회를 거쳐 국무장관, 전쟁성장관, 해군장관에게 보고된 후 최종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적 ‘일반 명령 제1호’로 확정되어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됐다.

그런데 러스크중령이 그날 밤 벽걸이 지도를 보고 서울과 인천이 포함되는 선을 고민하던 중에 38도가 눈에 띄어 그 선을 분단선으로 삼았다고 증언한 것은 위증이다. 왜냐하면 문제의 지도는 너무 작아 위도(緯度)가 1도 단위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10도 단위로 그려져 있어서 38도선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분할하면서 왜 하필이면 38도선이었을까? 1945년 7월의 포츠담회담에서 실무 회담으로 미국과 소련의 참모총장인 마셜 장군과 안토노프 장군의 회담이 있었다. 이 회담에서 동해안의 잠수함 작전 관할 지역을 조정하면서 한반도 동해안의 북위 38도에서 시작해 동해안의 북위 40도-동경 135도를 거쳐 북위 40도 45-동경 140도를 잇는 것으로 작전 경계선을 결정했다.

▼동해분계선 왼쪽으로 그어▼

38도선은 이 작전 분계선을 한반도 쪽으로 좌향(左向)해 연장한 것이다. 자를 대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은 것이 아니라 오른쪽의 동해분계선을 왼쪽으로 연장한 것이다.

이 분단선이 확정된 다음 미국은 소련이 이를 선선히 응낙한 데 대해 놀랐고, 소련은 위도가 그토록 남쪽으로 내려간 데 대해 놀랐다. 그 후 링컨소장은 40도선을 제시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여러 가지 분할안 중에서 3성 조정위원회의 현역 영관 장교들이 주장한 38도선은 그 중 최남단 분할선이었고, 이것이 최종안으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은 38도선이 군부(국방부)와 민간인(국무부)의 타협 선이 아니라 군부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할선이 이토록 남쪽으로 내려옴으로써 한반도 분할의 비극성은 더욱 가중됐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