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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리포트]툭하면 동료 빈자리 메우기 "판사는 괴로워"

입력 | 2001-08-14 18:31:00


서울지법 A합의부의 B판사 등 배석(陪席)을 맡고 있는 판사들은 최근 매주 한 차례씩 C합의부에 ‘대리출석’을 한다.

C합의부의 D여판사가 출산을 앞두고 휴가를 갔기 때문에 C합의부의 재판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교대로 C합의부로 가 빈 자리를 메워야 한다.

다른 정부 부처나 일반 회사에서는 3명이 일하다 1명이 자리를 비울 경우 나머지 2명이 일을 처리할 수 있지만 재판은 다르다. 법원조직법 7조5항에 “지방법원과 가정법원 또는 그 지원에서 합의심판을 해야 하는 경우 판사 3인으로 구성된 합의부에서 이를 행한다”고 못박고 있기 때문.

이로 인해 합의부에 자리가 빌 경우 인접 재판부의 배석판사가 ‘원정’을 가서 자리를 채우는 관행이 이어져 오고 있다. ‘판사 꿔주기’인 셈이다.

B판사는 “직접 심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사건 내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심리적 부담감도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두달동안 매주 1번씩 꼬박꼬박 다른 재판부에 출석했던 B판사는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으면 딴 생각을 하거나 졸기 일쑤”라고 털어놨다. B판사는 “책임지고 처리해야 할 사건과 판결이 밀려 있는데 다른 재판부의 재판에 출석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사건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판사 꿔주기’ 문제는 지난해 초부터 판사 임용 예정인 군법무관의 전역이 늦춰지면서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법관 정기 인사와 군법무관들의 전역이 매년 2월경으로 일치해 문제가 없었는데 군법무관들의 복무 기간이 늘면서 이들의 전역이 매년 4월말로 늦춰졌기 때문에 2개월의 공백이 생겼다.

법원은 이 기간 중 비는 판사 자리를 다른 재판부 판사로 채우고 있는데 이로 인해 ‘부실 재판’의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3월에는 변론에 참석하지 않은 법관이 판결문에 서명한 사실이 항소심 과정에서 밝혀져 1심 판결이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최근 여성 판사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출산휴가를 위해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아져 ‘판사 꿔주기’가 성행할 수밖에 없다는 점. 특히 지난달 통과된 모성보호법에 따라 11월부터 여성 법관들의 출산휴가가 60일에서 90일로 늘어나 인접 재판부의 남자 판사들은 꼬박 석달간 다른 재판부에 들락거려야 한다.

법조계에서는 이런 문제가 근본적으로 법관수 부족과 과다한 사건 배당 등에 따른 인력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유학 등을 위해 휴직이나 퇴직을 희망하는 법관도 매년 늘어나 인력 구조가 악화되고 있는 만큼 제도적 차원에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울지법 오세립(吳世立) 형사수석부장판사는 “법관 안식년 제도 등을 도입해 연구에만 전념하는 소수 판사들을 두고 대리업무를 맡도록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며 “우선적으로는 예산 지원 등을 통해 법관수를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