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머니! 목을 놓고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 높여 불러보아도/분명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에 살고 계시련만/왜 나의 외침을 듣지 못하시는 건지?/아무런 응답이 없구나/지난 8월 평양에서 50년 만에 그렇게도 애타게 그리워하던 어머님 품에 분명히 안겼건만/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건만/다시 갈 수가 없구나….’》
지난해 8·15 이산가족방문단의 의료지원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50년 만에 90세 노모를 만난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장가용(張家鏞·66) 박사. ‘한국의 슈바이처’인 고 장기려(張起呂) 박사의 둘째아들이기도 한 장 박사는 17일 노모 상봉 1주년을 맞아 방문 마지막날 천신만고 끝에 갖게 된 3시간 남짓한 짧은 만남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눈시울을 붉혔다.
50년의 기다림과 3시간 남짓한 짧은 만남, 그리고 다시 시작된 기나긴 기다림. 장 박사는 지난 한해 동안 사무치는 회한과 그리움으로 불러온 어머니 김봉숙씨(90)에 대한 사모곡을 조심스레 본보 취재진에게 공개하며 그동안의 애끓는 심정을 털어놓았다.
“지난해 10월 어머니가 왼쪽 몸에 마비증상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걱정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가 노모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지난해 10월.
그 이후 어머니 소식을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결국 해를 넘겼다.
갈수록 불안한 마음은 더해갔고 심적으로 도저히 안정을 찾을 수 없게 된 장 박사는 올해초에 어머니의 그리움을 담아 이 같은 내용의 사모곡을 썼다.
“올 4월이 돼서야 미국에 있는 친척을 통해 다시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최근 어머니의 건강한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을 입수한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중 결혼해 6남매를 낳은 그의 어머니는 51년 전쟁통에 남편과 헤어진 뒤 5명의 자녀를 홀로 이북에서 키워냈다. 둘째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온 아버지 장기려 박사도 평생을 ‘수절’했다.
장 박사는 “어머니의 남은 인생 동안 그간 못한 효도를 하며 같이 사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라며 북녘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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