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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캐릭터열전]'위험한 여인'의 마사

입력 | 2001-08-16 18:36:00


얼마 전 한 친구에게 난감한 부탁을 받았다. 내 오피스텔을 며칠만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캐묻자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사실은 오래 전부터 바람을 피워왔는데 그 사실을 마누라한테 이실직고했다나?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녀석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너 그러면 잘 했다고 칭찬받을 줄 알았냐?

▼지나친 정직의 피곤함▼

영화 ‘위험한 여인’은 너무 정직해서 주변 사람들을 난감한 상황에 빠트리는 여성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 영화를 ‘발견’한 것은 나만의 경로를 통해서였다. 볼 때마다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허공에의 질주’라는 영화에 홀딱 반해 그 작품을 쓴 여성 시나리오작가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작품 리스트)를 뒤지다가 찾아낸 작품이었다.

행여라도 이 칼럼을 읽고 비디오를 빌려봤다가 욕을 바가지로 해댈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영화는 그저 그렇다. 다만 데브라 윙거가 찬탄할만한 연기력으로 소화해낸 마사라는 캐릭터만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다.

마사는 일찍 부모를 여윈 이후 의원보좌관으로 일하는 숙모(바바라 허쉬)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노처녀다. 마사의 직장은 허름한 동네 세탁소인데 그녀가 그곳에서 해고당한 경위가 가관이다. 세탁소 주인 앞에서 이제 막 옷을 찾아가려는 손님에게 그 옷이 제대로 드라이크리닝 되지 않았다는 ‘진실’을 밝힌 것이다.

세탁소 주인과 동료들이 당황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마사가 어찌나 끈질기게 진실을 밝히는지 나중에는 손님마저 곤혹스러워 한다. 손님의 표정을 보면 그는 “설사 네 말이 진실이라도 나는 상관없으니 이제 좀 그만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손님이 나가자마자 주인은 마사를 해고하고, 마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대든다. 나는? 나 역시 주인의 편이다.

그뿐 아니다. 세탁소에서는 늘 잔돈푼이 도난 당하는 사고가 잇달았는데, 마사는 그 범인이 동료 여직원의 껄렁한 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앞뒤가 꽉 막힌 마사는 해고통보를 받자마자 모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범인을 지목한다.

그러나 좀도둑은 그 죄를 마사에게 뒤집어 씌운다. 정직한 마사로서는 펄쩍 뛸 노릇이다. 그후로 마사의 편집광적인 진실 밝히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틈만 나면 동료 여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네 애인이 좀도둑이라는 ‘진실’을 되풀이해 떠들어대지만, 당사자는 그녀의 전화질이 지겨울 뿐이다.

▼세상은 적당한 거짓에 익숙▼

영화 속에 등장해 그녀의 첫사랑이 되는 떠돌이 잡역부 청년(가브리엘 번)은 마사를 “순수함의 극치”라고 찬양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순수라면 나는 불순한 비순수를 받아들이는 편에 설 것이다. 마사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단세포적 반응 밖에 할 줄 모르는 ‘위험한 여인’이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마사의 진실은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세상살이의 진실이란 어쩌면 보다 비루한 것일지 모른다. 거짓과의 적당한 타협에 대한 암묵적 합의 같은 것 말이다.

심 산 besmart@nets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