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당연한 사실입니다. 무릇 살아 있는 것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현상에 대해 무척 곤혹스러워 합니다. 죽음이 두렵고, 죽음을 피해갔으면 좋겠고, 아예 죽지 않았으면 좋겠고, 죽더라도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어쩌면 인류의 문화는 이러한 죽음관들을 제각기 축으로 하여 선회하는 현상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마음대로 닥칩니다. 연령과도 상관없고 심지어 건강과도 상관없습니다. 죽음은 제멋대로 찾아옵니다. 하지만 대체로 죽음은 노년에 이르러 구체화되고 현실화됩니다. 나이를 먹으면 생리적 구조가 회복 불가능한 퇴행과정에 들어섭니다. 몸이 그렇게 되면 대체로 마음도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고 늙어가면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예상하면서 삶을 조망하는 것은 패배주의의 전형이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늙을수록 더 젊게 생의 의욕을 충동하면서 살아야 그것이 삶다운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죽음을 통해 조망하는 삶은 어두운 잿빛만일 수 있습니다. 삶의 보람과 의미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겠다는 의지를 휘날리면서 살아가는 것도 측은하기 짝이 없는 삶입니다. 당연한 귀결을 아니라고 우기는 모습이 그러하고, 자기 삶의 끝을 투시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고 보면 죽음을 어떻게 맞는가 하는 것, 곧 죽음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사람다움을 판단하는 준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을 다듬는 마지막 자리이고 삶은 죽음을 낳는 회임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다듬지 않으면 삶이 추해집니다. 또한 삶이 말끔하지 않으면 죽음자리가 지저분해집니다. 그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自尊)을 위해 그렇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늙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늙는 일이야말로 죽음을 준비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삶을 완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늙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는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을 서둘러 실천하는 일입니다. 미루거나 포기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지금 미루면 다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늙음은 죽음에 임박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죽는다 할지라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옳고 바르지 못하면 다시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오늘 사랑하고 용서를 빌지 않으면 영영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잘 늙기 위해서는 유예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삶이 남겨 놓는 것은 구겨진 죽음뿐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잘 늙기 위해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앞의 경우와 사뭇 다릅니다. 갈등적이기도합니다. 죽음이 임박했는데도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을 완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때로 삶에의 의지나 고상한 덕목이기보다 동물적인 욕심일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삶을 마감하려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을 자기가 아닌 다른 삶의 주체들이 언젠가 실현해 주리라고 믿는 여유나 너그러움으로 그 욕심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늙기 위해 해야 할 두번째 일입니다.
그 너그러움은 이제까지의 삶이 담고 있는 자기의 불완전함과 게걸스러움에 대한 참회입니다. 동시에 그러한 계기에서 지니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너그러움이 늙음을 채색하면 우리는 삶의 마지막에서 이제까지 다하지 못한 관용을 베풀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용서해주기를 빌 수 있으며, 마침내 모든 사람들을 신뢰하면서, 비로소 늙음이,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마침내 우리는 자유롭게 죽을 수 있습니다. 늙음은 이래야 할 듯합니다. 아니, 그렇게 늙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네 평균수명이 놀랄 만큼 늘었다는 소식도 들리고, 스스로 늙어간다는 자의식이 현실화되면서 공연히 죽음을, 그리고 늙음과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진홍(서울대 교수·종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