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 영어가 출중하다 해도 조지훈의 시 ‘승무’를 영역하기란 어렵다는 어느 영문학자의 말을 듣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어는 참으로 어렵다.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 영문도 모르고 배웠지, 만약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웠어야 할 입장을 생각한다면 아찔하다.
그 많은 어미 변화를 어떻게 문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미 변화는 그렇다 하더라도 저 천변만화하는 형용사는 또 어쩔 것인가? 우리나라 속담에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이 의미하듯이 우리 언어의 형용사 변화는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문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문헌에는 오역(誤譯)이 많다. 오역은 그 번역자의 외국어 실력이 낮을 경우와 번역자의 성실성이 부족할 경우에 일어난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용서받을 수 없지만 후자가 더 비난받을 짓이다.
그런데 이 오역을 자청해서 두 배로 부풀리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것이 바로 중역(重譯)의 문제이다. 언제가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일본어로 옮겼다가 영어를 거쳐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강심장의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병자호란 때 절의(節義)를 지킨 김상헌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둔갑한 적이 있었다.
긍정문(충신)이 부정문(역적)으로 오역되어 일어난 불상사였다. 외국어를 번역하면서 어찌 오류가 없을까마는 이것이 중역의 경지에 들어서면 그 오류는 배가되고 원래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역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에는 하나도 보태고 뺄 것이 없으며, 그런 자는 재앙을 받을 것’(요한계시록 22: 18-19)이라고 말한 성서에도 오역은 있다.
예컨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마태오복음 19: 23-24)는 구절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밧줄로 바늘귀를 끼는 것보다 어렵다’의 오역이다. 히브리성경 원전에서 낙타와 밧줄의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에 생긴 오역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후자가 상징적이고 순리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요한복음 1: 1)도 ‘태초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섭리(Logos)가 있었느니라’로 번역하는 것이 옳았다.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창궐한 것은 조선조 고종년간이었다. 이 병이 들어오자 당시 습속대로 중국의 이름과 꼭 같이 ‘虎列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이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호열자가 아니라 호열랄이다.
그런데 剌(이그러질 랄)이 刺(칼로 찌를 자)와 한 획이 다른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 병명이 보편화되자 ‘랄’과 ‘자’를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호열랄을 호열자로 오독(誤讀)하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누가 아는 체하며 ‘호열랄’이라고 했다가는 그 사람만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호열랄’이 콜레라에 가깝지 호열자는 엉뚱한 발음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실록에는 분명히 ‘랄(剌)’로 기록되어 있다.(고종실록 을미 6월 16일자)
천고마비(天高馬肥)라면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좋은 계절이니 책이라도 한 자 읽으라는 뜻으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오역이 또 가당치도 않다. 이 말은 본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때가 되었으니 반드시 오랑캐들도 지금쯤은 우리를 쳐들어 올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즉 국방에 더욱 마음을 쓰자(匈奴到秋高馬肥 變必起矣 宜豫爲備)’는 뜻이었다. 오랑캐들의 침입이 말이 살찌는 가을에 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이없이 책 좀 읽자고 뒤바뀌었는데 중국의 식자들 앞에서 아는 체하느라고 우리 식으로 천고마비의 계절 운운 하니 저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옷깃을 뿌리치고 돌아선다’고 할 때 ‘袂別’이라고 쓰고 몌별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그 몌자가 쓰기도 어렵고 발음도 고약해 이제는 모두들 결별이라고 읽고 아예 글자까지 ‘訣別’이라고 고쳐 쓰고 있다.
요즈음 한국인의 왕래가 빈번한 중국의 경제특구인 ‘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