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聖) 루이 시대의 국왕 축성식'/ 자크 르 고프 지음 갈리마르 출판사
트르담 대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하나의 성당이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한 이 성당은 루이 9세(1226-1270)가 예수의 가시 면류관을 매입한 뒤, 이를 보관하기 위해 왕궁 안에 지은 ‘생트 샤펠’이다.
498년 클로비스가 프랑스 최초의 왕으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후 프랑스 왕조는 그리스도 신앙을 유지해 왔다. 십자군 원정 중 사망한 루이 9세는 그리스도의 덕을 실천한 모범 왕으로 사후 26년 만에 성인품에 올라, 성(聖) 루이로 불린다.
5월 출간된 ‘성(聖) 루이 시대의 국왕 축성식’은 루이 9세와 프랑스 왕조의 그리스도교적 전통과 그 종교적, 정치적 의미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중세 필사본을 연구해 편찬한 것이다.
루이 9세 통치 말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필사본의 제목은 ‘왕의 축성식과 대관식을 위한 전례서’. 100쪽의 소품이지만, 예식을 진행하는 주교와 왕이 취해야 할 언행, 주교가 왕의 이마 어깨 손등에 기름으로 십자가를 긋는 도유(塗油)식, 셍드니 대성당에서 가져온 왕관과 반지 왕검 등(프랑스 왕조가 예식 때 사용하는 왕관 반지 등은 파리 북쪽의 생드니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의 수여식 등을 순서대로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축성식으로 신에게 바쳐진 왕은 예식이 끝난 직후 병자를 접촉하는데, 이 의식은 19세기 초까지도 계속 되었다.
현재 프랑스 중세 역사의 최고 권위자인 자크 르 고프와, 네 명의 중세 역사가가 공동으로 편찬한 이 책은 ‘전례서(왕실의 예식을 설명한 책)’의 완역, 15장의 그림을 포함하고 국왕 축성식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와 의미, 예식에 사용되는 음악 등을 분석한 필사본의 종합적 연구서다.
후세 왕들을 위해 쓰여진 이 전례서는 예식을 통해 그리스도 신앙의 수호자, 한 왕국의 통치자로서 왕에게 정의 평화 자비 등 그리스도교적 덕목을 강조하고 있다. 즉 왕의 지침서로서 대표적인 예라고 르 고프는 지적한다.
그런데 이 전례서는 축성식이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 왕의 축성식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파리가 아닌 랭스의 대성당에서 진행되었다.
렝스 대성당은 클로비스 왕이 영세를 받은 곳이고, 렝스 수도원에 클로비스 왕의 영세를 위해 신이 내려보냈다는 성유(聖油)병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성유는 왕위 계승과 왕권을 정당화했고, 신이 선택한 왕조임을 상기시키므로써 당시 지배세력인 교황과 프랑스에 근접한 독일 황제의 권한으로부터 프랑스 왕권의 자율성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례서’의 의식은 바로 이 자율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루이 9세는 그의 할아버지 필립 오귀스트, 손자 필립 르 벨과 더불어 프랑스 군주제를 확립한 왕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까지 프랑스인에게 이상적 군주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조혜영(프랑스 국립종교연구대학원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