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가 새로 고쳐 번역한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를 최근에 읽었다. 새 번역에서 조르바는 만년의 피카소가 그린, 거침없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질서가 살아있고, 유치하면서도 완전한 춘화들 같았다. 원작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카잔차키스의 조르바가 원래 이랬는지 아니면 번역자의 적극적 개입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새 번역이 만들어낸 조르바는 끔찍히도 생생했다. 역시 이윤기였다.
1980년판 번역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젊었다. 선악의 잣대로 잴 수 없고 또 이성과 감성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더할 수 없는 속물이자 초인인 조르바, 조르바라는 한 인간의 생명력이 내뿜는 거칠 것 없는 자유와 근원 없는 모순들, 그 영웅적 신화는 마냥 놀라웠다. 내 젊음과 어우러지며 고양된 조르바는 한동안 경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십수 년의 거리를 두고 새 번역을 다시 읽을 때는 좀 달랐다. 소설 속의 화자(話者)인 ‘두목’은 숙명적으로 문자세계에 속하는 인간이다. 현실세계에 갇혀 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감히 떠나지도 못하는, 그렇고 그런 지식인인 그는 자신의 ‘결여’인 조르바의 존재를 사랑하고 희구한다.
그러면서 조르바에게 다가가려 하나 다가가지도 못하고 또 결코 다가갈 수도 없다. 자신의 문자가 세운 세계가 허상인 것을 번번히 확인하면서도 그는 그 세계의 문지방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그와 조르바 사이의 만날 수 없는 간극이 소설의 밑바닥에 어떤 막연한 슬픔으로 풍경처럼 깔려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무의식중에 이 둘 사이의 거리에 내 스스로를 끊임없이 대입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챘고, 또 문자세계의 한 조각 그것도 좁디좁은 경제학에 감금돼 있는 현재의 내가 불현듯 타자로 느껴졌다. 그래서 착잡해지기도 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두목의 눈부신 넋두리 앞에서는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고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이다.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이 말에 혹한 나머지 이 구절을 다른 데서도 인용한 적이 있지만, 이 구절에서 나는 지식의 한계와 허망함을 읽는 동시에 역설적 안도감, 그것도 근원적 차원의 안도감을 함께 느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내 속의 경제학자에 대한 구차한 변명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두어도 한판의 바둑’이라는 말을 이 변명의 사족으로 덧붙인다.
김균(고려대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