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제의 신화와 현실'/더그 헨우드 외 지음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옮김/140쪽 8500원 이후
신경제가 단골 화두의 하나였던 것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누구도 신경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신경제의 원조인 미국경제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IMF는 미국경제의 마이너스 성장과 달러화의 가치 폭락은 시간 문제라고 발표했다. 물가와 실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던 미국의 신경제가 왜 이 지경으로 되고 있는가?
지난 1, 2년 사이 우리 나라에서도 신경제를 주제로 한 수십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 신경제를 하나의 새로운 바람직한 모델로 이상화하여 설명했을 뿐이며, 신경제가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 신경제에서도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를 다룬 책은 찾아 볼 수 없다.
‘신경제의 신화와 현실’은 바로 이와 같은 공백을 메운다는 데 일차적 의의가 있다. 이 책은 대부분 주류경제학의 관점에서 쓰여진 기존의 신경제 연구서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입장에서 신경제에서도 관철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른바 ‘먼스리리뷰 학파’에 속하는 이 책의 저자들은 신경제는 현실이 아니라 일부 주류경제학자들이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신경제의 핵심이라고 이야기되는 정보기술(IT) 투자는 인터넷쇼핑몰과 같은 유통부문에서 주로 이루어져 유통시간을 단축시켜 자본의 수익성을 개선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19세기 산업혁명에 비견되는 생산성의 비약적 향상은 이루어내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또 이들은 ‘과소소비설’의 관점에서 신경제도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에서 유래하는 과잉생산과 과소소비 경향 (‘소비자 구매력에 비한 설비의 과잉팽창’)의 결과인 공황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최근 신경제의 붕괴 조짐이 완연해지자 얼마 전까지 신경제론의 나팔수 노릇을 했던 일부 주류경제학자들 (예컨대 마이클 만델)도 ‘인터넷 공황’, ‘기술 순환’ 등으로 돌아 서고 있지만, 신경제가 절정일 당시에도 이에 미혹되지 않고 신경제의 자본주의적 본질을 분석하고 공황의 필연적 도래를 일관되게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 책의 저자들과 같은 좌파 경제학자들이다.
저자 중의 한 사람인 더그 헨우드 (그는 얼마 전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월스트리트’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신경제의 본질은 금융거품이라고 분석한다.
즉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경제의 호황은 실물경제의 수익성보다 훨씬 높이 치솟은 주가에 뒷받침된 소비지출과 미국으로의 세계 자본의 유입이 만들어 낸 거품이며, 주가 폭락에 따른 소비 위축 (마이너스 자산효과)과 투자 감소와 함께 이미 불황으로 반전되었고, 여기에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적자가 곧 초래할 달러화의 가치 폭락과 자본유출이 가세하면 미국경제와 세계경제는 대공황의 수렁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한다.
이 책은 또 신경제 시기 급증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실증분석하면서, 신경제의 호황은 디지털혁명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기초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신경제는 ‘구경제’와 마찬가지로 착취와 불평등으로 얼룩진 ‘똑같이 불합리한 경제’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 한 사례로서 미국 신경제의 대표적 엔터테인먼트 산업인 디즈니가 상품화하고 있는 ‘헤라클레스’ 같은 ‘환타지’는 시간당 30센트도 안되는 제3세계의 저임금 노동의 착취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은 조금 빨리, 즉 신경제론이 한참 뜨던 1, 2년 전에 출판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와 같은 환상이 깨진 오늘 세계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모순을 인식할 수 있는 대안적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또 비판적 시각에서 쓰여진 최근 미국경제에 대한 개론적 입문서로서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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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진(경상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