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어느 주말 TV에서 ‘007 네버다이’라는 영화를 방영해서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물론 황당한 첩보영화이고 피어스 브로스넌인가 하는 배우가 제임스 본드로서는 숀 코너리보다 훨씬 못했지만 아슬아슬하고 통쾌한 액션 스릴러로 한여름의 짜증을 날려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줄거리는 어떤 세계적인 언론재벌이 자기 소유의 텔레비전과 신문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중국제로 위조한 폭탄으로 영국 군함을 침몰시켜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영국 첩보국이 밝혀내고 제임스 본드가 분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재미있게 감상하면서 슬그머니 이 영화를 방영하는 이유가 언론사 탈세 고발, 언론개혁 요구와 관련해서 ‘언론사는 핫 뉴스를 제조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메시지를 유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는 증거는 없지만 1987년 대선 때 투표일 직전에 공산당이 수백만명의 인명을 학살하는 것을 보여주는 ‘킬링필드’라는 영화가 방영돼 투표에 영향을 미친 것을 생각하면 아주 그럴듯하지 않은 추측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서 눈치 없기가 백치 수준인 나도 대한민국 국민 노릇 반세기 만에 어렴풋이 ‘눈치’가 트이기 시작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어떤 정부정책이 발표될 때 나는 그 표방하는 의도와 목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 사람들에게는 정부의 발표는 아예 참고사항도 되지 않는다. 그들이 정책의 ‘정치적’ 속셈을 가차없이 분석하는 것을 들으면 전부 수긍할 수밖에 없어서 나는 언제나 내가 ‘숙맥’같이 느껴지고 속으로 몹시 창피하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에서는 생존의 부적자(否適者)로 체념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주말영화가 방영된 이유를 상상해 보면서 나도 ‘센스’가 좀 생기는 것인가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얼마 후에 운전 중 휴대전화 통화 단속 계도기간을 3개월 연장한다는 발표가 나왔을 때 이미 단속이 시작된 줄 알고 운전 중에는 전화를 안 받고 있던 나는 휴대전화 사용을 단속하는 데 계도기간이 그렇게 길어야 하나 의아해했지만 무심하게 넘겼다. 그리고 나서 휴대전화 단속의 연기가 휴가철에 휴대전화를 이용할 수 있게 해서 보궐선거를 앞두고 인심을 회유하자는 계책이라는 분석을 보고 또 한번 낭패감을 맛보았다.
몇 해 전 터키에 갔을 때 그곳에서는 1달러가 십 몇만 리라였다. 그래서 자국 아이들의 수학실력을 키우는 데는 좋겠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매우 불편하다고 했더니 그곳 사람들이 매우 재미있어 했다. 그런 엄청난 화폐 단위의 팽창은 국가경제가 매우 불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한국정치의 불투명성은 국민의 ‘눈치’와 분석력 신장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부와 국민간에 신뢰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물론 한국에서만 국민이 정부 정책의 ‘꿍꿍이속’을 짐작해 보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들도 그런 분석들을 즐겨 한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대부분 그것이 재미있는 지적 유희이지 우리나라에서처럼 자주 분노와 한숨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3대 요건으로 국방과 경제와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신뢰를 꼽았는데, 그 중에서 신뢰가 마지막 보루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국방과 경제에 의존해서 존속했는데 국민이 직접 선출한 정부가 들어서서도 신뢰가 회복되지 못하고 정부는 ‘공적자금’과 물리적 힘의 행사로 어렵게 버텨나가고 있다.
야당이나 여당이나 오로지 관심은 ‘재집권’과 ‘집권’에 있고 내놓는 모든 정책은 정권연장 또는 장악용이니 국민은 내년으로 다가온 선거를 생각하기만 해도 지겹고 호감을 가졌던 정치인도 ‘대선주자’니 ‘대권주자’로 거론되기만 하면 역겹게 느껴진다.
항공안전 2등국으로 추락하고 모든 국가기반이 부실해져도 선거에서만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살면서 그래도 선거를 하는 나라에 사니까 북한 주민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자족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서지문(고려대 교수·영문학·본보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