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에서 조사를 받다가 의문사한 서울대 법대 최종길(崔鍾吉·당시 42세·사진) 교수가 당시 중정 발표와 달리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최 교수가 수사관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사실도 새로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박정희(朴正熙) 유신체제하의 ‘의문사 1호’로 손꼽혀온 최 교수 사망사건의 진상규명 작업에 전기가 마련됐다.
▽조사 결과〓대통령 직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양승규·梁承圭)의 김형태(金亨¤) 제1상임위원장은 20일 최 교수 사인에 관한 중간발표에서 “당시 수사관들이 최 교수를 심문한 문답자료(100여쪽)를 두 달 전 국정원에서 넘겨받았는데 여기에는 ‘간첩’이라는 말조차 언급돼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당시 수사에 참여한 일부 수사관에게서도 최 교수가 자백한 사실이 없다는 증언을 얻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이에 따라 ‘최 교수가 간첩이라는 자백을 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중정 건물 7층 화장실에서 떨어졌다’는 당시 중정 발표는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또 “올 1월부터 당시 수사관 10명과 경비원을 포함한 옛 중정 직원, 법의학자 등 총 182명에 대해 조사한 결과 수사관들이 최 교수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사실도 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조사결과에 따라 최 교수 죽음의 실체는 ‘유신체제에 항거해 서울대 학생들의 첫 데모가 일어나자 박 정권이 국면전환을 위해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에 최 교수를 엮어 넣어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유족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됐다.
▽유족 반응〓고인의 아들인 최광준(崔光濬·38) 경희대 법대 교수는 “위원회의 발표내용은 그동안 유족이 제기해온 간첩 무혐의 주장을 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최씨는 “당시 중정에서는 고인이 평양에서 보름간이나 간첩교육을 받았으며 노동당 입당까지 했다는 터무니없는 조작을 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고인이 조사 받을 당시(73년 10월16일 혹은 17일경) ‘학교 직원 두 분이 갈테니 수첩을 내주라’는 고인의 친필 메모를 들고 중정 직원(나중에 알고 보니) 두 명이 집에 찾아와 고인의 수첩을 가져갔다”며 “그런데 중정은 10월19일 고인의 사망사실을 발표하면서 ‘최 교수 집을 압수수색한 결과 난수표와 간첩들의 연락망이 적힌 수첩이 발견됐다’고 억지를 부렸다”고 말했다.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것과 관련해서도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88년 검찰조사때 공개된 부검 사진에는 다리와 엉덩이 부분에 고문의 흔적으로 보이는 찢어진 상처가 있었는데도 정부는 고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이번 위원회 발표에 의미를 두었다.
이에 따라 최 교수의 유족은 최 교수의 직접 사인과 관련, ‘간첩이 아니었다면 자살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명백한 타살’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위원회는 아직까지 신중한 입장이다.
김 위원장은 “가혹행위가 목숨을 잃게 할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며 “최 교수의 직접 사인이 추락사였다는 것을 전제할 때 스스로 뛰어내렸거나 가사(假死) 상태에 있는 그를 누군가가 밀어 떨어뜨렸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최 교수를 집중 심문했던 당시 수사관을 만나러 미국에까지 갔으나 본인의 완강한 조사 거부로 이뤄지지 못했다”며 진상규명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최 교수는 73년 10월16일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 참고인으로 당시 중정 감찰실 직원이던 동생 종선(種善·54·미국 거주)씨와 함께 중정에 자진출두했다가 사흘만인 10월19일 의문의 변시체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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