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 들어선 ‘문민정부’가 ‘변화와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개혁에 따르는 고통 분담을 호소했을 때 많은 국민은 박수로 환영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기적으로 개혁을 필요로 했다. 오랜 기간 누적된 군사문화의 잔재를 씻어내야 했고,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 의식 행태를 바꿔야 한다는 데 공감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타인에 대한 개혁이지 자신에 대한 개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개혁의 대상이 아니고 남이 개혁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문민정부 때 단행된 개혁조치들, 예컨대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등록, 역사 바로세우기 등은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한 개혁이 아니었다.
그러나 1998년 2월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라는 큰 부담을 안고 출발했고, 그 부담은 바로 구조조정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받았기 때문에 국민의 정부에 있어서 개혁은 구조조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만이 아니고, 여태껏 평생이 밝게 보장된다고 믿었던 은행원과 대기업 사원들이 줄줄이 명예퇴직 조기퇴직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직장에서 쫓겨나게 됐고 구조조정이 예감되는 인텔리 사원들이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이것은 80년대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위해 데모에 나섰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80년대의 그것이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어다면 이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개혁이 계속되는 동안 개혁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됐다. 개혁은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나의 일이요, 생존의 문제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때부터 개혁에 대한 불안과 저항이 팽배하게 됐다.
국민의 정부는 이런 엄청난 부담을 안은 채, 햇볕정책을 기저로 하는 대북정책을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2000년 6월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이에 고무된 정부는 햇볕정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그렇게 쉽게, 그리고 단기간에 성사될 사안이 아니었다. 1945년 이후 반세기에 걸친 냉전적 대결구도, 그 구도 속에서 받은 반공교육,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 아웅산테러 그리고 간단없는 무장간첩의 침투 등 끊임없이 자행된 북한의 도발행위로 불안과 불신이 몸에 밴 국민에게 쉽게 수용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불신과 불안이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퍼주기만 한다, 끌려만 다닌다는 등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되자 정부는 보수 수구 반개혁 반통일로 치부하면서 그런 목소리를 위축시키려 했다. 이런 국면에서 착수된 언론사 세무조사는 그 진의 여부를 떠나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들을 침묵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정치는 오케스트라에, 그리고 통치자는 지휘자에 자주 비유되곤 한다. 오케스트라에는 다양한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 있다. 지휘자는 각각의 악기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리를 하나의 화음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그 본분으로 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에는 다른 어떤 교향곡보다 많은 다양한 악기가 등장하고,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가 동원된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소리들이 하나의 화음을 이루면서 끝내는 자유를 찬미하는 것으로 승화되기 때문에 더 없는 감동을 주게 된다.
집권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용인하고, 그것을 소재로 하여 하나의 화음을 엮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오케스트라는 악장마다 속도와 강약이 다르다. 이것은 교향곡의 생명이고, 이것 때문에 교향곡은 물 흐르듯 하지 않고, 계절이 바뀌듯 한다. 정치에도 강약과 고저의 호흡조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통치자에게 주어진 재량이요, 특권이기도 하다.
정치는 오기(傲氣)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야투(野鬪)에서 몸에 밴 오기를 부리려 해서는 안 된다. 정치에 오기는 금물이다. 정치는 정의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의는 겸허한 초심으로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때 나타나게 된다. 대한변협이 법치주의의 후퇴를 우려하고, 32인의 원로들이 공론의 장을 위축시키지 말기를 충언하고, ‘성숙한 사회 가꾸기 모임’에서 지금의 세태가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속뜻을 헤아리는 용기를 발휘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박영식(광운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