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여전. 주말을 이용해 작가 이문열(李文烈·53)씨가 자택겸 사숙(私塾)으로 쓰고 있는 경기 이천 ‘부악문원(負岳文院)’을 찾아갔다. 작가가 ‘곡학아세(曲學阿世)’와 ‘홍위병’ 논쟁에 휩싸여 고군분투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작가의 고향 후배인 출판사 사장과 함께 서울에서 밤 9시가 넘어서야 출발한 탓에 이천 작가의 집에 도착한 것은 11시가 넘어서였다. 작가의 표정은 예상과는 달리 무척 밝고 편안해 보였다.
자정무렵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다음날 새벽 3시가 돼서야 끝났다. 그의 아내 박필순(朴畢順·52)씨가 쉴새없이 주방을 들락거리며 술과 안주를 내왔다. 작가의 서실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 오전 9시경 일어나 슬그머니 집을 빠져 나와 고속도로로 들어설 즈음 출판사 사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작가의 부인이었다. “아침 상 차려놓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9시가 넘어 할 수 없이 방문을 열어보니 방이 텅 비어 있어 깜짝 놀랐다. 찾아준 손님들에게 아침대접도 못해 보내서 어떻게 하느냐”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문열이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저토록 버틸 수 있는 힘이 아내의 내조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8월 22일. 오전 11시경 다시 작가의 집을 찾았다. 전날 전화통화에서 “아주머니를 만나 두분이 살아온 얘기나 좀 들었으면 좋겠다”고 운을 뗐더니 작가는 대뜸 “아마 안될겁니다”라고 ‘단언’했다. 전화에 앞서 며칠동안 작가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스크랩을 모두 뒤졌지만 부인에 관한 얘기는 찾아 보기 힘들었다. 92년 한 신문에 기고한 ‘나의 삶, 나의 생각’이란 글에서 자신에 대해 “아직까지는 내가 베푼 것 보다 받은 것이 많은 아내의 남편”이라고 기술한 내용과 한 여성지에 “아내의 ’전폭적인 서비스‘에 익숙해 있다”고 말한 대목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내의 사진이 게재된 곳도 전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문단과 출판계의 지인, 그의 친인척 및 고향 선후배들에게 연락을 취해 밤을 새워가며 ‘이문열의 아내 박필순’에 관한 얘기들을 동냥하듯 주워 모은 뒤 무작정 부닥쳐 보기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난 것이었다.
이문열 박필순부부의 다정한 한때. 솜씨 맵씨 맘씨가 두루 뛰어난 박필순은 헌신적이고 사려 깊은 내조로 오늘의 이문열이 있게 했다. 작가 이문열의 문학적 성취는 따라서 일정 부분 그의 아내의 몫이라는 것이 문단 안팎과 지인들의 일치된 얘기다.
#작가와 부인은 기자의 불시방문 의도를 ‘원천봉쇄’ 하기로 ‘사전 합의’한 듯, 인터뷰 관련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이 댁에서 자고 먹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 이미 취재는 다 마쳤고, 다만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왔을 뿐”이라고 배수진을 쳤으나 여전히 완강했다.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을라 치면 말문을 닫고, 수첩을 접으면 이런 저런 얘기를 건네는 사이 1시간여가 흘렀다. 문단에 나오기전 기자생활을 했던 작가가 기자의 이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여보, 당신이 해결하구려”하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줬다. 이 기사는 그래서 작가 부부 간의 대화, 기자의 틈새 질문, 그리고 이들 부부를 잘아는 이들의 ‘체험담’ 등을 엮어가는 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박필순. 밀양박씨로 17세 때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남편과 동향(경북 영양)으로 한 살 터울이다. 대학 중퇴 후 세차례나 고시에 낙방한 채 실의에 빠져있던 문학청년 이문열과 73년 3월 11일 결혼, 슬하에 재웅(在雄·28) 재유(在由·24) 기혜(沂慧·19)등 2남 1녀를 두었다.
박씨는 10년 전쯤 세상을 떠난 이문열의 바로 밑 여동생과 친구 사이. 셋째 며느리이지만 결혼 이후 95년까지 만 22년 간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사시사철 집에는 작가 출판인 기자들이 찾아오고 일가친척이 수도없이 집안을 들락거렸다지만 싫은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고 작가의 지기(知己)들은 입을 모은다.
자수와 음식 솜씨가 빼어나고 서예도 수준급이다.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사진 제목은 ‘미녀와 야수’라고 하면 좋겠다”는 농이 어울릴 정도로 고운 얼굴에 늘 웃는 낯이다. 작가 이문열의 ‘문학적 뿌리’가 그의 고향과 월북한 부친이었다면 아내 박필순은 남편 이문열의 ‘정신적 안식처’일까? 기자는 작가의 아내에게서 실존인물로 작가 문중의 정신적 지주였던 소설 ‘선택’의 주인공 ‘정부인 장씨(貞夫人 張氏)’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별 볼일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셨습니까?
“글쎄요. 그냥 좋았으니까 그랬겠지요. 그래도 신혼초기에는 요즘의 ‘이문열씨’ 보다 제가 더 자신있고 당당했던 것 같아요.”
-남편이 지금처럼 ‘큰 작가’가 되리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냥, 잘 될 거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어요. 당장은 불우해도 그저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올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 이문열은 ‘시대와의 불화’에 못지 않게 ‘페미니스트와의 불화’도 겪었고, 요즘은 마치 ‘우파의 거두’처럼 인식되고 있는데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을 어떻게 보십니까?
“자기 소신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유교적’이긴 하지만 ‘가부장적’이라거나 ‘반페미니스트적’인 사람은 분명 아니예요.”
-남편이 가정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남녀는 각기 역할이 있고 효용도 다르다고 생각해요. 남자가 자기 일을 열심히 해 가족을 봉양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 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남편이 쓴 글에 대해 항의를 해오거나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하는 분 들의 전화를 받게 되실 때도 있을텐데요?
“전화하신 분들이 전화를 걸기 전보다 더 노여워 하시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남편에 대한 내조가 각별하신 것으로 문단 안팎에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내조랄게 뭐 있나요. 남편이 집안 걱정않고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노력한 정도지요.”
-남편이 다반사로 술 담배 재떨이 심부름을 시킨다면서요?
“그게 무슨 큰 흉인가요. 남편이 글을 쓰느라 서재에서 사나흘씩 밤을 꼬박 새우다가 초췌한 얼굴로 신문을 보거나 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얼굴을 비출 때는 그런 심부름 보다 더한 심부름이라도 해주고 싶어요.”
-홀로된 시어머니를 20여년 간 봉양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어머니를 모시면서 제가 얻은 게 더 많아요.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더라면 제가 지금보다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훨씬 더 많았을거예요. 어머니가 계실 때는 그 어른이 집안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작고하신 뒤에는 남편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지요.”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의 친구나 후배들이 찾아오고, 친지들이 며칠씩 묵어갈 때는 솔직히 좀 짜증스럽지 않던가요?
“결혼 초기에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따랐어요. 음식 열가지를 장만하라고 하면 다해야 하는 줄 알았지요. 요즘은 열가지를 시켜도 서너가지만 해요. 술자리는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게되고 얻는 것도 많아 귀찮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예전에는 술자리 논쟁도 끝날 무렵이면 이야기가 하나로 모아지고 정이 느껴졌는데 요즘은 한사람 목소리만 들리고 서먹서먹하게 끝나는 일이 잦아 아쉽기는 해요.”
-남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몇번이고 사양하다) ‘시인’이예요. 그 작품이 기대 만큼 읽히지 않은 것이 아쉬워요.”
-결혼 이후 가장 감격스러웠을 때는? (이 질문을 하면서 기자는 ‘남편이 신춘문예로 등단하게 됐을 때’ 쯤의 대답을 내심 예상했다)
“막내 딸을 얻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오후 2시경 부인이 정성껏 내온 콩국수를 먹고 다시 한 시간을 더 괴롭힌 끝에 3시경 가까스로 인터뷰를 마쳤다. 부인이 식사 준비를 하느라 주방을 들락거리는 사이 동행한 사진기자는 응접실에 걸린 가족사진부터 도둑질하듯 찍어뒀다. 부인이 사진취재에 응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응원에 힘입어 집을 나서기 직전 부인이 자수를 하는 모습을 몇 컷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집앞까지 전송나온 작가는 기자에게 “예전에는 아내의 내조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50이 넘어서부터는 ‘내가 아주 특별한 행운’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그 얘기가 기자에게는 최상의 언어로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이문열식 어법’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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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이 본 박필순씨▼
▽작가의 책을 내고 있는 출판사 사장〓사모님이 자수를 하시게 된 것은 글 쓰는 남편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문열의 고향 후배인 출판사 사장〓전형적인 종가의 며느
리다. 언제 어느 때 손님을 끌고 가도 싫은 내색없이 맞아주기 때문에 “그의 부인을 알면 이문열을 미워할 수가 없다”고들 얘기한다.
▽한 출판사 편집장·문학평론가〓한번은 젊은 출판인들이 이천 댁에 놀러갔다가 밤에 나이트 클럽에 갈 생각으로 나섰다가 사모님께 불려가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 하더라도 밤늦게 남녀가 나이트클럽 가는 건 안된다. 내 집안에서 노는 것은 괜찮지만 집밖으로 나가는 건 허락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얘기하셨는데 다들 아무 소리도 못했다.
▽문하생 출신 소설가〓선생님 글은 물론이고 제자들 글도 거의 다 읽다시피 하는데 그 감각이 대단하다. 한밤 중에도 술상 차려 내오는 걸 마다한 적이 없어 사모님 덕에 이문열 선생 곁에 사람이 많이 몰린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결코 내성적인 분은 아니고 아주 활달하다. 이선생님이 “내 이룬 것의 절반은 저 사람 몫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30대 집안 조카〓대학 다니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댁에서 오래 기거했지만 한번도 싫은 내색을 하신 적이 없다. 시어머니가 다소 무리한 말씀을 하셔도 그 앞에서는 무조건 “예 ”라고 하셨다. 종부는 아니셨지만 사실상 맏종부 역할을 감당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