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일의 능력에 앞서 일할 기회를 만나는 것이다.
내 경우 그놈의 ‘지명도가 없다’는 원죄 탓에 번번이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되면서 비감한 심정이 드는 때가 많다. 무조건 유명해야 산단다, 유명해야. 대체 어떻게 해야 유명해진담? 광화문 네거리에서 발가벗고 뛰어볼까? 그까짓 것 못할 것도 없겠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쳐다보기나 하겠는가.
소재가 달리는 코미디 작가에게 만만한 게 도둑놈이라는데, 그럼 나도 만만한 정치 비판에나 소매 걷고 나서 볼까. 그러나 아니다. 넘쳐흐르는 정치 비판 속에서 ‘배설의 쾌감’ 이상을 발견하기 힘든 게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 사회가 어지러운 주원인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이라는 ‘차명계좌’보다는 분화된 사회의 룰을 내면화하지 못한 시민사회의 몫이 더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언젠가 TV 토론회에 나가 입 방정을 떨었다가 사방에서 돌팔매를 맞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섣부른 대중비판은 자살골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크게 유명하지 않아도 일이 척척 생기는 비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 소위 ‘인간성’으로 밀고 나가는 거다. 모난 돌이 정에 얻어터지는 한편에서 둥글둥글 인맥 관리에 진력한 소위 인간성 좋은 돌들에게는 마법처럼 일과 지위가 따라다닌다. 인간성에 대한 기억 한가지. 언젠가 밥을 사먹는데 식당 TV에서 모델 선발대회를 한다. 보통 모델도 아니고 슈퍼에다 엘리트씩이나 되는 대단한 모델 선발이었다. 사회자가 한 참가자에게 좋은 모델의 조건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정말 1초도 지체됨이 없이 그녀 입에서 답변이 튀어나왔다. “역시 인간성이죠!”
허어. 잘 다듬어진 몸매도, 멋진 걸음새도 아니고 인간성이라니 이 무슨 심오한 말씀인가.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녀가 ‘인성이 모델행위에 미치는 존재론적 일고찰’을 행하고 얻은 답변 같지는 않다. 그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심사위원의 호감을 살 것 같아서 나온 말이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러고 보니 반항기 가득해 보이는 젊은 연예인들도 카메라 앞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온통 효자 효녀에 순진무구형 천사표들뿐이다. 인간성, 인간성을 권하는 사회다. 이쯤 되면 모델만이 아니라 첨단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도, 입법을 하고 건축을 하고 운동시합하는 데에도 인간성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나오지 않을까.
나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의 능력이나 일에 대한 열정, 세계관 같은 것에 앞서 이른바 인간성부터 따지고 드는 정의적(情誼的) 사회 풍토에 유감이 많다. 인간성이 좋다는 평판은 좋은 인간관계를 원천으로 하는데 거기에는 대개 겸손, 양보, 헌신, 가족애, 이웃사랑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사람살이는 아름다운 추상명사의 세계가 아니다. 그 좋은 이미지의 숨은 그림자 속에서 비굴, 대세 추종, 처세술, 가족이기주의, 자아결핍 따위를 목격하는 건 그야말로 인간성이 나빠서일까.
물론 겸손-비굴, 양보-대세 추종 따위의 대립항은 한 인간의 내부에서 한솥밥을 먹는 형제지간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단층이 가로놓이게 된다. 남들 다 하는 방식대로, 좋은 게 좋은 모습으로 살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정말 괴로운 사람은 어떻게 해야 인간성이 좋아질 수 있을까. 예컨대 사람들은 어찌 그리도 자주 만나야만 하고 술을 마셔야만 일이 풀리는 것일까. 나는 일주일에 한두 차례 이상 저녁 약속이 있는 대학교수를 학자로서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저녁마다 하염없이 폭탄주까지 마셔가면서 ‘인간관계’를 도모해야 하는 것은 인간성 도야가 아니라 일종의 집단폭력이 아닐까.
인간성 중시 풍토의 뿌리는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농경사회적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비틀려 확대된 게 혈연, 지연 등 연고주의 같은 씨족집단의 유습이며 고질적인 위아래 따지기다. 하긴, ‘나 좀 그냥 내버려 달라’고 주인공이 비명을 지르는 소설 ‘좀머씨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면 인간성 도야에 지친 사람도 많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매일 저녁 혼자 노는 ‘인간성에 문제 있는’ 프리랜서가 살아갈 길은 여전히 아득해 보인다.
김갑수(시인,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