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란 어차피 우리의 목표다. 어떤 숭고한 가치와 인생의 궁극적 의미가 점점 상실될 때 우리는 그 과정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속도는 결과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정의 윤리성을 따지지도 않는다. 속도의 쾌락은 소실점을 향한 맹목의 질주로 완성되는 것이다.
만약 이 모든 수사에 동의한다면, 아뿔싸! 당신의 삶도 무의미의 파란에 휘감겨 있는 실정이다. 속도 외에 달리 그 무엇이 필요하랴. 입학, 승진, 섹스 등 삶의 모든 터닝 포인트가 오로지 속도에 지배를 받을 뿐이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에서 이같은 맹목의 질주를 경계했다. 아, 어찌하여 느림의 미학은 사라졌는가. 쿤데라는 정답을 알면서도 잠시 은유의 메시지를 던진다. 초원의 목동, 들판을 거닐던 방랑자들. 그러나 현대는 그같은 한량들에게 치명적인 굴욕의 쓴 잔을 건넬 뿐이다.
그렇다면 속도의 광신자들은 오로지 성공의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한 속물들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미국 소설계의 아웃사이더 폴 오스터는 ‘우연의 음악’에서 항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감, 차를 몰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돌진해 나가는 즐거움’,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만족시켜야 하는 갈망’이 된다. 그 맹목의 질주에서 폴 오스터는 “바로 자기의 목숨을 자기 손에 맡겼다”는 존재론적 충만감을 느낀다. 속도의 직유가 되는 자동차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소’가 되는 것이다.
물론 최근 개봉한 영화 ‘드리븐’을 즐기는 데 있어 소설가들의 고통스런 성찰까지 필요하지는 않다. 시속 400㎞로 질주하는 경주용 자동차의 속도란 일상의 속도가 아니며 성찰의 계기가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화면을 압도하는 머신들의 질주와 귀청을 때리는 배기음은 우리가 실존하는 이 세상의 어떤 단면을 순식간에 증명하고 있어 잠시 아찔하다.
실베스타 스탤론 주연의 ‘클리프 행어’ ‘다이하드 2’의 레니 할린이 감독했다는 목록만으로도 늦여름의 열기를 더욱 부채질할 만한 영화. 엑셀레이터의 광란을 따라잡기 위한 능수능란한 카메라의 관능적인 ‘춤사위’는 헐리우드 액션의 또다른 백미다.
정윤수/스포츠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