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같은 소리를 낼 때 ‘아니오’를 외치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을 비판하고 그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면그건 자칫 형극(荊棘)의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늘 어디선가 가시밭길을 마다않는 ‘용기있는 왕따’들이 나타나 세상의 흐름을 바꿔왔다.
국회 열린정치포럼의 초청으로 29일 한국을 찾은 일본 시민단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 21’(이하 네트21)의 다와라 요시후미(俵義文·60) 사무국장. 그는 올초부터 일본열도를 달군 왜곡교과서 불채택운동을 진두지휘한 사령탑이다.
당초 10% 채택을 목표로 했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모임)의 왜곡교과서는 그 채택률이 0.1%에 불과,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고비마다 중요한 지침과 정보를 제공하고 기자회견 등을 통해 ‘용기’를 보여준 그의 활동상은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의 왜곡교과서 반대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힘겨운 싸움에 뛰어들어 고생을 자초하는 것일까.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만난 다와라 국장은 “하마터면 못 올뻔 했다”는 말부터 꺼냈다. 27일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서 급성장염 진단을 받았다는 것.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쓰러진 탓에 소주를 이틀간 못 마셨는데 20년 만의 기록”이라는 농담으로 안심시키는 여유를 보였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불채택운동은 ‘일본정부는 지고 시민은 이겼다’ ‘일본 양심의 승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승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우선 ‘모임’의 ‘제품’이 워낙 형편없다. 내용을 읽어보면 누구라도 교과서로 쓸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일본의 가해 사실을 은폐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위험한 교과서’ 아닌가. 그런 교과서가 채택되면 일본은 국제고아가 될 거다.”
일본에서 ‘왜곡교과서하면 다와라’라 할 정도로 그는 교과서문제 전문가다. 8월초 한국에도 번역서가 출간된 ‘철저검증-위험한 교과서’를 비롯, 교과서 문제 관련 책도 20권여권이나 냈다.
그가 왜곡교과서 반대투쟁에 그토록 천착(穿鑿)하게된 이유는 뭘까. 첫 단서는 그의 직장이 교과서 출판사였다는 데서 나왔다. 1964년 주오대(中央大) 법학부를 나와 교과서 출판사에 취직한 그는 이듬해인 65년 이에나가(家永) 도쿄교육대 교수가 ‘교과서검정은 헌법위반’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그 지원운동에 뛰어들었다.
“32년을 끌었던 이 교과서 재판을 끝까지 지원했다. 이 싸움이 있어서 82년 역사교과서 왜곡 시도를 무산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모임’ 등의 교과서공세는 그 성과를 부정하고 20년 전으로 회귀하려는 것이다. 자칫 내 인생의 3분의 2를 바쳐온 일이 무의미해질 위기였다.”
그는 98년 자신이 주도해 만든 ‘네트21’도 이에나가 재판정신을 이어받은 단체라 말한다. 지난해 3월에는 아예 정년을 2년 앞두고 회사를 그만뒀다.
“만일 ‘모임’ 교과서 채택률이 높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덕에 전국 각지에 출장도 다닐 수 있었다.”
올 4월부터 본격화된 불채택운동에는 강연, 서명운동, 인간띠잇기, 집회 등 갖가지 이벤트가 동원됐다. 이 중 그가 직접 발로 뛰며 한 강연만도 전국 150여군데에 이른다. 그는 불채택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침묵하던 다수의 일본인들에게 나름의 참여방법을 제시한 것’을 꼽는다.
10엔씩에 판매한 ‘이것이 위험한 교과서다’라는 전단은 순식간에 25만부가 나갔다. ‘네트21’의 4000여 회원 중 절반 가까이는 최근 1년 사이 가입했다. 가장 예기치 않은 호응을 얻은 것은 신문광고싣기 모금운동. 1구좌 1000엔짜리 모금을 시작한 지 불과 한달만에 개인 3000명과 260개 단체가 참여, 1300만엔(약 1억6000만원)이 모였다.
“도쿄와 인근지역 만에서 모은 게 그만큼입니다. 아사히(朝日)신문 등 여러 신문에 왜곡교과서 반대 전면광고를 내고도 남아 한국의 동아일보에도 전면광고를 냈지요.”
7월26일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는 한국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인과 일본정부와 같은 생각인 줄 알았는데 양심적 시민과 시민조직이 있다는 걸 알게 돼 반갑다”는 한국인들의 전화와 팩스 편지들이 쇄도했다고 한다.
-일본 내에서 매국노 등의 비난을 들었을텐데 힘들지 않았는가?
“협박이나 비아냥은 일상적인 일이다. ‘모임’그룹은 나를 ‘중국 한국 북조선의 앞잡이’ ‘반일(反日)역적’ ‘비(非)국민’ 등으로 중상하고 있다. 그런 얘기들은 무시하고 넘어간다. 신상의 위협까지는 없으므로 두려워할 일도 없다. 내게는 지지해주는 많은 동료가 있고 우리는 결코 소수파라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이 왜 자꾸 보수우경화하고 있는가? 경기심체와 고령사회화로 돌파구가 없어 그렇다는 분석도 나오던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대중매체나 정계, 재계 쪽은 보수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런 측면이 자꾸 부각되니까 일본 전체가 보수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 국민들은 다르다. 이번에 그 싹이 보이지 않았는가.”
특히 그는 불채택운동과정에서 보인 젊은 층의 참여가 고무적이라고 본다. 대학생 그룹이 인간띠잇기나 서명운동에도 참여하고 도쿄대의 경우 교직원과 학생들이 연대해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했다는 것.
“역사왜곡의 진짜 목표는 일본을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젊은 층은 전쟁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군대에 가야할 주인공들이다. 무관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일본 학생들이 제대로된 역사를 배우지 못한 탓에 외국에 나가서 괴로움을 겪는 일들이 흔하다고 그는 전한다.
한국 등 아시아의 시민운동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점도 큰 성과로 꼽았다. 한국과 일본 모두 90년 대에 시민운동이 발전했고 양국 시민운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에서 협력하면서 우호관계를 다져온 덕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됐건 그가 교과서 문제에 투신하는 이유는 “일본을 위해서”다. “나는 일본이 아시아 여러나라와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는 소주를 좋아한다. 매일 식사 때 반주(飯酒)로 마시는 정량이 캔맥주 한병과 500cc짜리 컵에 뜨거운 물을 섞은 소주 두잔씩이다.
“밖에서는 더 마신다. 그래도 절대 알코올 중독은 아니다. 간장(肝腸)이 알코올용으로 돼 있는 것 같다.” 그의 너스레를 옆에서 듣던 이마무라 쓰구오(今村嗣夫·69) 변호사가 “간장의 주인이 둔한 것 아니냐”고 농담을 건넨다. 한국 국회의원 4명이 제기한 ‘역사왜곡교과서 제작 및 반포 금지 가처분 신청’소송을 맡고 있는 이마무라 변호사도 이번에 다와라 국장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수입원을 묻자 그는 아주 상세히 사정을 설명했다. “‘네트 21’에서 받는 월급은 정확히 10만엔이다. 단체 재정을 고려해 내가 제안한 금액이다. 회사에서 받던 연봉의 8분의 1 수준이다. 다만 올해 4월부터 연금이 나오고 여러 대학에서 강사도 하는 덕에 연봉으로 치면 3분의 1로 줄어든 정도다. 가족들이 ‘생활은 해결되니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권하니 할 만하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잠시. 왜곡교과서를 막는 싸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한다. “불채택운동이 끝난 뒤 ‘모임’측은 기자회견에서 ‘4년 뒤 복수하겠다’고 했다. ‘모임’은 이미 공민 교과서를 출판했고 초등학교의 사회와 국어교과서도 낼 예정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의 경우 내년 4월에 검정신청해 2003년 채택되게 된다. 곧 대처를 시작해야 한다.” 교과서 문제는 평화헌법 수호 문제와 역사인식 전후보상 등 다른 주제들로 이슈가 확대될 가능성도 크다.
올해로 60세. 여느 사람같으면 은퇴를 생각할 나이다. 그러나 그는 “당분간 은퇴가 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내 취미는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테니스다. 시즌당 20일 정도 스키를 했는데 올 겨울에는 설날 딱 한번 밖에 못가 욕구불만 상태다. 머나먼 얘기이긴 하지만 은퇴하고 온천이 있는 시골에 작은 집을 사 겨울이면 스키, 여름엔 테니스를 하며 책을 쓰는 게 꿈이다.”
세상의 흐름이 바뀌고, 그의 꿈이 이뤄질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일까.
만난사람=서영아기자
▼다와라씨는…▼
▽41년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생
▽64년 주오대(中央大) 법학부 졸업
▽64년 신흥출판사 입사
▽65년 이에나가(家永) 교과서재판 지원회원 이 되어 98년까지 활동.
∼88년 노동조합 집행위원 등 비상근 임원을 13회 역임.
같은 기간 교과서회사 노동조합들이 결성한 교과서공투회의 임원을 9회 역임.
▽93년 일본출판노련 교과서대책 사무국장
▽현재‘어린이와교과서전국네트21’사무국장
출판노련 교과서대책 부부장
와코(和光)대학 등 강사
▽저서 ‘어린이가 표적이 되고 있다-교과서는 어떻게 변했는가‘
‘철저검증-위험한 교과서’ 등 20여권
▼한국인들이 본 다와라씨▼
△김민철(金敏喆) 일본교과서 바로잡기운동 본부 집행위원장〓일본 교과서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의 NGO들에게 그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전형적 운동가로 성실하고 치밀하면서도 헌신적이다. 그 분 입장에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면서 못마땅했던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특성은 ‘와’하고 급하게 몰아쳐 일을 척척 해내기도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기도 하는 식인데 일본은 꼼꼼하게 확인하고 원칙을 지키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양쪽이 서로 조금식 닮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김은식(金恩植)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왜곡교과서 불채택운동의 승리는 90%가 그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하는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연락을 해서 제대로 통화해본 적이 없다. 늘 어딘가에 출장을 가 있는 상태다.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거의 매일 일본 전역을 다닌다. 교과서 왜곡문제라면 열일 제치고 달려가는 것이다.
△양미강(梁美康)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총무〓낡은 양복, 특히 유행 지난 짧은 바지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까만 배낭을 늘 들고 다니는데 그 안에 교과서 관련 자료들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전문가다. 책을 20권이나 썼으니. 머리와 발이 조화된 분인 것 같다. 한가지 문제에 평생 그렇게 집요하게 파고드는 점이 가장 존경스럽다. 한국에도 그런 분이 있어야 하는데….
△함승희(咸承熙) 의원〓이번 후소샤(扶桑社) 교과서 소송문제로 6번이나 일본을 오가면서 의외의 소득을 얻었다. 바로 다와라 국장이나 이마무라 변호사 같은 양심세력이 일본에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분들이 정말로 일본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애국자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