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도 간첩이 있습니까”
‘8·15 민족통일대축전’의 여파가 마침내 DJP 공조라는 정권 기반까지 흔들고 있다. 그동안의 과정이야 어떻게 됐건, 결과적으로 북한이 놓은 덫에 우리가 걸려들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북측은 보수 우익이니 반(反) 통일세력이니 하면서 의도적으로 남남갈등을 조장해 오다가 ‘8·15 축전’을 갈등의 기폭제로 삼은 것 같다. 임동원(林東源) 통일부장관의 해임문제를 둘러싸고 생긴 민주당과 자민련의 균열을 북한은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을까. 자기들의 의도가 성사되고 있다고 축배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따지고 보면 작년 6·15 남북공동성명 이후 내부 갈등과 진통을 더 많이 겪고 있어야 할 곳은 우리보다 북한이어야 한다. 햇볕정책대로라면 북한은 계속 ‘폐쇄의 옷’을 벗고 있어야 하고 지금쯤 그에 따른 진통과 갈등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정작 시끄러운 곳은 북한이 아닌 우리다. 왜 그런가. 쉽게는 개방사회와 폐쇄사회, 민주체제와 독재체제의 특성과 그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사회이니 소란할 수밖에 없고 저쪽은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니 조용할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北은 변함없고 南만 시끌벅적▼
그러나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혼돈은 그런 안일한 분석의 대상이 아닌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의 근본이념이 흔들리고 있는 판이다. 대낮에 인공기가 걸리고 공공연히 북한의 적화통일방안을 지지하는 세력이 등장해도 처벌을 하느니 않느니 하면서 엉거주춤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최근에는 간첩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얘기를 꺼내면 “요즈음도 간첩이 있습니까?”라고 되묻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냉전적 적대개념을 아직도 못버렸느냐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회가 온통 색깔 시비에 휘말리다 보니 간첩에 대한 생각과 인식마저 모호해졌다. 정말 남파간첩은 이제 전설 속으로 사라진 걸까.
서독의 동방정책이 한창 진행되던 70년대 중반, 동독은 화해분위기를 타고 1만여명의 간첩을 서독에 밀파했다고 한다. 우리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를 봐도 남파간첩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더 확대됐다. 북측이 가만히 앉아만 있겠는가.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즘 들어 간첩을 검거했다는 공안당국의 발표는 한 건도 없다. 검거실적이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우선은 북한 눈치를 본다는 생각이 든다. 남파 간첩을 검거했다고 발표하면 공연히 남북한 사이에 논란거리가 생기고 그렇게 되면 좋을 것이 없다는 게 공안당국의 판단인 것 같다.
또 간첩을 검거했다고 발표하는 그 자체가 햇볕정책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우리가 온갖 지원을 다해주고 있는 북한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햇볕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자연히 나오게 될 것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정부가 이처럼 간첩 검거마저 쉬쉬할 정도로 북한 눈치를 보고 그들의 심기를 헤아리는 데 열중해서야 무슨 ‘햇볕의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오히려 계속 북측의 ‘수’에 말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측이 보낸 팩스 한 장을 믿고 남측인사들의 ‘8·15 축전’ 참석을 허용한 정부의 처사가 그 전형적인 예다.
▼조바심 버리고 내부 결속을▼
현정권은 좀 더 차분하게 남북관계를 관망하고 정리할 때가 됐다. 1년 남짓 남은 임기내에 기필코 무엇을 더 성취해 놓겠다고 무리를 하면 그동안의 성과마저 다 잃게 될지 모른다. 이제는 남북대화가 그렇게 시급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반도주변의 정세를 살펴보면 북한과의 대화가 단절됐다고 당장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매달린다고 해서 북측이 선뜻 대화에 응할 상황도 아니다. 초조해 하고 쫓기는 듯한 우리의 모습만 초라해 보일 뿐이다.
지금보다 더 흔들리게 되면 정권이든 사회든 함께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북쪽만 바라볼 게 아니라 우리 내부를 살피고 결속하는 일이 시급하다. 다음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효과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그 바탕을 다져주는 것이 현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남찬순chans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