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1,2' 에밀 말 지음/각 350쪽 내외 14000원/눈빛▼
“예술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가장 쉬운 방편이다. 그러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으뜸 가는 수단이다.”
괴테의 말이다. 이런 논리의 역설은 예술과 현실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미술하고 역사도 철부지 연인들처럼 노상 토라졌다가 화해하기를 되풀이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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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말은 1950년에 까다로운 연인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근사한 이 책을 엮어냈다. 미술의 거울을 통해서 사라진 역사를 더듬고 먼 이웃들과 만난다는 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하고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른 것도 있다.
곰브리치가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유아들 보행기라면, 에밀 말은 제법 까불기 시작하는 개구쟁이들의 씽씽카 턱은 된다. 요리조리 균형을 맞추면서 안 돌아다니는 골목이 없다. 라파엘로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신이 내린 르네상스의 천재를 곰브리치는 그림 딱 석 점 갖고 손을 털었지만, 에밀 말은 자그마치 열 두 점이나 늘어놓고도 입에 침이 마를 줄 모른다. 그렇다고 거장들만 편애한 건 아니다. 작은 예술가들의 뛰어난 수작들도 알뜰하게 챙겼다.
미술사학에서는 보통 곰브리치를 첫 학기 교재로 쓴다. 두 학기 넘어 같은 책을 붙들고 늘어지는 법은 없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땐 신기한 풍경에 넋을 잃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마치 미끈한 오픈카를 타고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짜릿한 느낌이랄까? 그런 점에서 곰브리치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미술사 입문서다.
거기에 갖다 대면 에밀 말은 동급으로 쳐주기엔 배기량이 한참 떨어진다. 번쩍거리는 도판도 모자라고 엔진소리도 조용하다. 호흡도 느리다. 후딱 읽어치우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달려도 머리가 개운해지는 드라이브 코스로는 그만이다.
에밀 말은 중세 연구가로 필명을 날렸다. 13세기 고딕 미술을 다룬 책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미술사의 성지 위에 우뚝하다.
따지고 보면 독일의 한스 벨팅이나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도 중세에서 현대로 단숨에 직행했다. 학문적 엄정성에다 중세적 상상력을 멋들어지게 버무렸다는 게 이들 석학들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에밀 말의 ‘서양미술사’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세끼 밥보다 예술을 더 사랑하는 프랑스 인들의 애틋한 감성까지.
미술의 역사를 휘저어서 독자의 예술적 감수성을 들뜨게 하는 저자의 글 솜씨도 볼만하지만, 그걸 에누리없이 옮겨낸 역자의 정성도 만만치 않다.
노성두(서울대 강사·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