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기가 위축되면서 경기부양과 함께 구조조정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들은 한결같이 부실기업의 퇴출과 부실채권의 처리, 그리고 정부 소유가 된 금융기관의 민영화를 강조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137조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 은행의 부실자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출자지분이 급격히 증가해 많은 은행들이 정부의 은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은행 민영화를 추진하기 위해 은행법을 개정하고 내국인의 은행 소유한도를 10%로 확대할 예정이지만 금융 주력 기업이 아닌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소유 상한을 여전히 4%로 제한할 예정이어서 대기업들의 은행 소유는 여전히 어렵게 돼 있다. 이 때문에 은행 소유를 원하는 대기업들은 산업자본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인해 외국기업에 헐값으로 팔아야만 은행을 민영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불평한다.
민영화 대상 은행의 자본금 규모는 은행당 1조∼4조원에 이르므로 거대 산업자본이 아니고서는 이들 은행에 투자하기 어렵다. 그렇다고는 해도 산업자본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민영화를 저해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선진국 대형 은행의 경우 펀드, 연기금, 보험사 등 기관투자가가 주식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은행과 산업자본의 결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엄격한 방화벽을 설정해두고 있다.
일부에서는 은행 민영화를 은행의 ‘주인 찾아주기’와 동일시하고 단일 지배주주가 있어야 민영화가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국내 산업자본이 은행의 단일 지배주주가 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은 주인이 직접 경영함으로써 발생하는 이익을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외환위기 이전에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한도가 4%로 제한돼 있을 때에도 몇 개 대주주는 은행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은행을 지배하는 대주주들은 은행의 수익성을 높이는 데 등한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은행을 부실화시켰다. 따라서 산업자본을 제외한 내국인의 은행 소유 한도를 확대하려는 이번 은행법 개정의 방향은 바르게 설정됐다.
하지만 산업자본에 대한 규제를 제외한다면 정부는 은행 민영화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있다. 우선 정부는 산업자본을 대기업의 자기자본이나 총자산 규모를 기준으로 자의적으로 정의하고 산업자본을 직접 규제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방식보다는 동일 그룹 내 모회사와 자회사간, 은행의 소유와 경영간 엄격한 방화벽을 설정하는 등 금융의 투명성을 높이고 금융감독체제를 선진화하여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직접규제에서 시장규율과 금융감독에 의한 규제로 이행해야 한다.
둘째, 은행을 민영화하면 정부 보유 주식의 판매로 공적 자금이 회수된다. 만약 정부가 공적 자금 회수를 목적으로 민영화를 추진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공적자금의 조기 회수를 공언했으므로 회수를 서두르려는 정치적 입장은 이해한다. 그러나 부실은행에 투입된 자금은 회수가 늦어지기 마련이며 지금이 정부 보유 주식을 팔기에 적기도 아니다. 추가 공적자금이 필요하다면 매를 맞더라도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예전과 같이 유통되지 않는 채권을 추가 발행해야 한다.
셋째, OECD나 IMF와 같은 국제기구들이 은행 민영화를 권고하는 것은 관치금융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금융정책 당국자들은 더 이상 관치금융은 없다고 항변하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위기 국면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이 필요 이상으로 강화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가 암묵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금까지의 관행을 시정하지 않는 한 은행 민영화는 공염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정부에 실망한 사람들은 민간자본의 은행 지배를 기대하게 되지만, 금융시스템이 과도한 규제와 정부 개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면 민영화가 돼도 신통하게 달라질 것은 없다.
은행 민영화 성공의 요체는 관치금융으로 대변되는 금융 관행의 개선과 은행 자율성의 확보에 있다. 은행의 소유자나 경영자들이 정부의 눈치를 살피는 한 은행의 책임경영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박원암(홍익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