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가을을 정리의 계절로 규정했다. 귀가 멍해지는 소음 속에서도 완전히 정지된 내면의 시간을 갖고, 옷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떼어내듯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모든 것을 털어버리라고 권유한다. 정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잠시라도 그런 시간을 확보한다면 보다 살맛 나는 가을을 맞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불평등은 여전해도 가진 자의 절제와 못 가진 자의 자존이 그래도 조금은 조화를 이루지 않을까 기대된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우리의 몸보다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 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잠시도 서로를 위한 생각에 잠길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런 불안정과 소용돌이 속에서 눈을 감아보니 떠오르는 것은 혼란스러운 소설의 메시지다.
키르기스스탄의 작가 칭기스 아이트마토프는 소설 ‘카산드라의 낙인’에서 기발한 이야기를 던진다. 그에 따르면, 수태된 직후 태아는 다가올 인생에서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예견한다. 그리고 미래의 삶이 온갖 악으로 점철돼 있는 것을 알고 태어나는 것을 거부하는데, 그 의지는 임신 초기 산모의 얼굴에 기미나 반점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상의 인간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그 의지는 사라진다. 태아가 자신을 기다리는 숙명과 화해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카산드라의 태아로 지구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인류의 악은 점점 축적돼 파멸 직전의 포화 상태에 도달한다.
소설은 새로운 세기에 인류가 당면한 문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이 구성한 하나의 허구는 전 지구적 우주적 미래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우리의 혼잡한 현실을 묘사한 것으로 먼저 받아들여진다. 나는 카산드라의 태아가 아니었던가. 지금 널려진 상황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우리가 저질러 놓은 악의 배설물은 아닌가.
생각이 이런 극한에까지 이르는 아침에는 아무리 바빠도 눈을 잠시 감아볼 수밖에 없다. 드디어 정국은 작은 파국을 맞고 말았다. 파국 뒤에는 어차피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기 마련이지만 불안한 정치가 규정하는 내일의 삶이란 여간 두렵지가 않다. 경제는 이미 이론가의 것이 아니다. 동네 시장에서 거래되는 무거움에다 전 세계적 불황의 예견까지 겹친다.
비대해진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먹을 것은 많아도 식탁과 그릇이 모자라면 굶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듯하다. 대학의 수시모집 계획으로 동원된 교수는 연중 바쁘지만 고등학교 교실은 더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합격한 학생, 떨어져 다시 준비하는 학생, 처음부터 다른 것을 준비하는 학생, 아예 포기한 학생들이 어울려 잡답(雜沓)하다.
그나마 개혁과 사상을 둘러싼 격정의 대립은 잠시 소강상태인 듯 주춤하다. 각자 타협과 진전을 위한 사색의 준비기간이라면 안심이지만, 침묵하는 다수가 목소리를 내야 할 때라는 식의 반격적 태도는 과연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동안 크고 작은 사회의 논란이 소수의 웅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소수가 주도한 개혁이 사사건건 좌초한 원인에 다수를 선동한 정치적 반대가 방해로 기여한 바는 없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 통일부장관의 해임은 정말 야당이 주장하는 대로 현정권의 실패한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의 심판인가. 현실의 조건에서 남북교류의 실행에 중점을 두는 것이 옳지 않다면 과거의 것을 반복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른 대안이 있는가. 8·15 방북단의 ‘돌출행동’은 그 실체보다 다른 면이 집중 부각됨으로써 오히려 남한에서 ‘돌발상황’으로 바뀐 점은 없는가. ‘만경대 정신’이란 표현 때문에 처벌받는다면, 그 근거는 그 조어의 본질적 사회반가치성 때문인가 아니면 포괄적인 정부의 행동지침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인가.
이런 점들에 대한 사색이 있어야 한다. 다수의 분위기에 눌려 오히려 제대로 얘기되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런 고려와 배려가 없는 사색은 그 뒤에 다가오는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눈을 뜨는 순간 감기 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카산드라의 후예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차병직(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