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골 바위협곡
청송땅 푸른 솔은 새벽 안개비 속에서도 그 때깔이 청청하다. 안동 청송 두 땅을 확연히 구분짓는 화산재를 힘겹게 오르던 914번 지방도가 마루턱에서 한 숨 돌리고 이제 막 내리막으로 달릴 즈음. 고갯길 비탈밭에는 늦여름 땡볕에 바짝 약이 오른 청송 세척고추가 소나무 세상 청송땅의 온통 푸른 빛에 반기를 들고 계곡밭에서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주왕산 가는 길. 그 아침의 청송땅 풍경은 이랬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날. 청송읍에서 주왕산 국립공원 매표소로 향하던 길가(928번 지방도)에서는 풍요의 가을이 색채로 다가왔다. 노란 호박꽃 만발한 밭에서 나뒹구는 축구공만한 주황색 호박, 소금을 흩뿌린 듯 꽃으로 하얗게 뒤덮인 메밀밭, 빨갛게 익은 홍로(사과)와 설익은 연두색 풋사과, 아직 영글지 않은 푸른 대추가 주렁주렁 가지에 매달린 나무….
주왕산 중심봉 기암과 대전사(아래)
청송 명물 주왕산(해발 720m), 누구나 칭찬을 아끼지 않는 비경의 산이다. 장대한 바위가 솟은 열두 산봉과 태행 대둔 금은광이 등 해발 600m 이상의 고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석병산이라고 불렸던 이 산. 웅장한 산세와 넉넉한 품세는 반도의 허다한 산과 구별될 정도다. 거기에 골 안팎 풍경마저 유별이 심대하니 산의 묘미는 점입가경이다.
상의매표소 입구의 대전사에서 바라본 주왕산의 정상인 기암(旗岩). 낙락장송 몇 그루가 고고한 모습으로 정수리를 장식한 거대한 수직형상의 바위군은 주왕산의 얼굴격이다. 그 암봉으로 각인된 주왕의 산경. 멀리 서서 볼수록 그 장대함은 힘을 더한다. 그 뿐인가. 수려한 바위의 직벽 아래에 놓인 계곡의 자태, 그 바위 사이에서 추락하고 깨지는 계류의 활달수려한 흐름은 골안 깊숙이 진입할수록 더욱 볼 만하다.
대전사를 지나 주방천 상류인 수달래 계곡으로 올랐다. 3㎞쯤 걸어 시루봉 학소대 두 수직바위를 지나니 제1폭포가 나타났다. 선녀탕과 구룡소에서 게으름 피던 물은 오랜 세월 계류에 팬 바위홈을 타고 추락하다 중간의 바위용소에서 잠시 숨을 죽이는 듯 하더니 이내 널찍한 용소에 흘러든다.
이리로 계속 산을 오르면 내원동 마을. 열세가구가 해발 500여m 계곡분지에서 살아가는 대표적인 오지마을.
주왕산의 뒤안도 한번 돌아보자. 원시적 풍경으로 사진작가의 단골 촬영지인 주산지(역시 논물을 대느라 물이 빠져 지금은 볼품이 없다)쪽으로 난 ‘절골’이 거기다. 발길이 잦지 않아 아직도 풋풋한 자연미가 절로 배어나오는 이 곳. 계곡의 하이라이트 비경이 매표소에서 멀지 않아 산행에 진저리치는 여행자에게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계곡 물길을 따라 너럭바위를 밟고 15분쯤 오르면 바위 협곡이다. 이 안에 들어서면 정면에 원목으로 계단과 다리를 만들어 걸어둔 곳에 이른다. 협곡 양안의 수직바위 벽에 갇혀 내가 선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 된다. 들리느니 물 소리, 느끼느니 바람뿐. 주왕산 비경을 송두리째 오감으로 체득하는 데 전혀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식후경/명일식당▼
주왕산의 상의매표소까지 가는 좁은 길은 양편에 산채백반이며 손칼국수 산채전 찹쌀막걸리 등을 파는 식당이 줄지어 있어 눈과 입, 코가 즐겁다.
두리번거리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한중간의 명일식당(주인 조태희·054-873-2904)앞. 한 할머니가 평상에 꿇어 앉아 칼국수 가락을 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외갓집 할머니를 뵌 듯 해서다.
고운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노르스름한 반죽(콩가루와 밀가루를 1대 4로 섞었기 때문)을 밀던 이명덕 할머니. 일흔일곱의 적지 않은 연세지만 지금도 하루에 밀가루반죽 30덩이는 거뜬히 밀어 칼국수 가락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한 15년 됐나, 여기서 칼국수 만든지. 옛날에는 길가에 칼국수 미는 할매가 쭉 늘어섰었는데….” 지금은 단 세 분뿐이었다.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낸 깔끔한 국물에 넣고 끓여낸 손칼국수. 호박 채나물을 얹어 내는 데 시원한 국물 맛도 일품이지만 콩가루 섞인 덕에 톡톡 끊어지는 칼국수 가락의 담백한 맛도 별미였다. 값은 3000원. 산채정식(8000원)과 사과 더덕을 통채로 넣고 맛을 낸 찹쌀막걸리도 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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