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유령같이 돼 버렸소. 허공에 떠돌아 다닌다고….” 인터뷰를 청하느라 전화를 했을 때 김윤식(金允植·65·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슬쩍 이런 혼잣말을 버무렸다. 낡은 아파트를 수리하느라 남의 집에 머무른다는 설명을 얼른 보탰지만, 정년퇴임한 그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예사롭게 들리는 말이 아니었다. 정년퇴임식 닷새 후인 5일 오전 서울대 인문대 1동. 노크에도 답이 없어 연구실 문을 빼꼼히 열자 그 ‘유령’은 200자 원고지를 찢을 듯한 기세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앉으소” 한마디. 그리고는 쓰던 글을 마무리하느라 원고지 앞으로 다시 돌아갔다. 대체 무슨 ‘유령’이란 말인가. 그는 여전히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켠’(1962년 ‘현대문학’ 추천완료 소감 중) 탐구자였다.》
정년퇴임을 하며 김교수는 기념논문집을 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지금까지 펴낸 책들의 서문들만 간추려 ‘김윤식 서문집’(사회평론)을 출간했다. 첫 책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 연구’(73년) 이래 27년간 쓰고 번역하고 엮은 책이 102종.
그러나 단지 양적인 방대함 만으로 그가 동학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근대문학사 연구의 한 획을 긋는 저작으로 꼽히는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문학사 연구 최초로 카프(KAPF.1925∼35년에 존재했던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실체를 드러낸 이 책을 쓰기 위해 그는 먼지 뒤집어쓴 채 묻혀있던 카프계열 문헌 3000여종을 읽고 1600여종 이상을 노트에 연필로 베껴썼다. 자신이 알고자 하는 일의 진상을 캐기 위해서는 금서인 마르크스주의 책을 읽는 일이든,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납·월북문인의 흔적을 좇는 것이든 그는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그 덕에 한국근대문학사연구의 실증자료들이 쌓였다.
“김교수는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며”(황종연 동국대교수) 살아왔다. “윤달에 태어나 생일도 없는 놈”이라고 잡아떼며 규칙과 전통에 물음표를 던졌다. “한국문학이지 왜 국문학이냐”며 ‘한국문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애정으로 경직된’ 선배들을 치받았다.
‘하루 200자 원고지 20장씩 집필’이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일찍 자고 일찍 깨어 오전에 글을 쓰는 생활이 수십년째다. 결혼을 했지만 그에게는 애면글면해야할 자식이 없다. 일종의 현장확인인 여행을 제외하고는 취미도 없다. 그의 삶은 “인생을 대가로 치르고 문학을 하는 광기의 현시(顯示) 그 자체”(이인화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였다. ‘죽음 이외의 휴식은 없다’(‘한국 근대문학의 이해’ 서문 중)던 그의 글은 스스로의 운명을 예언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도, 그 어떤 이념의 경도자도 아닙니다. 내 이념은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인간은 나아질 수 있다는 오직 그것 뿐이었소. 인류에게 이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소.”
-지금도 그 이념이 실현되리라고 믿습니까.
“아니, 그럴 수야 없게 됐지요. 하지만 이 환장할 희망을 버리고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겠소. ”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을 하늘의 별이 밝혀주던 시대는 복되도다’로 시작되는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그의 경전이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신과 인간이 구별되지 않았던 황금시대에의 도달을 꿈꾸었다.
그러나 창공의 별을 찾는 그가 발 딛은 땅은 영광된 아테네가 아니었다. 그는 전후의 폐허에서 일본어로 된 중고책을 읽으며 지적 자양분을 흡수해야했던 열등감 많은 ‘식민’의 후손이었다. 제 손으로 국민국가를 세우지 못한 분단국가의 백성이었다.
보편적 역사발전 법칙에 따라 유토피아로 가자면 ‘근대’를 건너뛸 수 없었다. 근대의 완성을 꿈꾸는 그에게 한국 근대문학은 숙명의 연구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같다는 착각’으로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그의 나이 쉰셋 되던 해, 동구권이 붕괴됐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합법칙적으로 발전하는 역사개념은 이제 “끝장”이라고 사망선고를 내렸다. “인간은 벌레가 아니라 인간이므로 그 위엄에 걸맞는 문학을 한다”고 생각해온 그 앞에 “인간은 벌레다. 인간이 뭐가 다른가”라고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소설이 던져졌다. 그에게는 답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94년)을 보니 ‘모천회귀’를 얘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벌레일 수도 있고, 은어일 수도 있는데, 그 은어가 모천회귀를 한다고? 그렇다면 은어처럼 사람도 돌아가야할 무엇에 대한 지향은 여전히 지닐 수 있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역사적 상상력을 대체하는 생물학적 상상력에 눈이 뜨였소.”
-그 생물학적 상상력이 ‘세계와 인간은 진보한다’는 선생님의 믿음과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역사의 종말’의 저자 후쿠야마의 최근작 ‘대붕괴 신질서(원제 The Great Disr-uption)’를 보니 근친상간을 금하는 인자가 우리 DNA안에 있다고 합디다. 생물학적으로 종족의 멸망을 막을 장치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지. 이것처럼 인간의 DNA 속에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하는 인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믿어볼 수도 있지 않겠소?”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정년퇴임을 했지만 그는 이번 학기에도 강의를 계속한다. 명예교수로서 서울대 대학원에서 강의하지만 동국대 대학원에서도 강의를 맡았다. 서울대 붙박이였던 그가 정년퇴임으로 자유로워지자 몇몇 대학에서 다투어 그에게 강의를 청했다.
68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전임강사가 된 이래, 그의 강의는 학생들 사이에 손꼽히는 ‘명강’이었다. 출석확인과 수업에 대한 헌신성 요구로는 ‘악명’ 높았지만 그래도 들어야할 강의였다.
“출발하기 위해서는 탈출해야 한다. 가정,이웃,친구,사회같은 익숙한 인연의 사슬로부터 …. 모든 것을 의심해라. 미지를 향한 네 야성적 본능을 키워라” 라는 그의 사자후는 갓 스물 안팎 젊은이들의 영혼을 내리치는 죽비였다. 법대 1학년 때 김교수에게서 들은 ‘교양 국어’강의의 충격으로 한국 문학도로 변신하게 된 이동하(李東夏·서울시립대)교수 같은 학생들이 속출했다.
-교수에게 왜 강의에 열심인가 묻는 것이 어불성설이겠지요. 하지만 연구와 교수 두 가지에 모두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아서….
“여기 내 방의 책들을 보시오. 열심히 했다느니 뭐니해도 이건 모두 시체일 뿐이야. 파우스트박사가 갈파했듯이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고…. 나는 이 시체에 육신을 빌려주는 존재일 뿐이야. 그런데 강의실로 들어가면 빛나는 눈동자들이 있어요. 그걸 보고 어떻게 내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그러나 정작 김교수는 스스로를 “학생들이 상종하기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라고 규정한다. 자신이 ‘패배자’이기 때문이란다. “어디를 눌러도 좋은 소리만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패배자요. 패배자는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가혹한 법이지.”
-대과없이 정년퇴임에 이르렀고,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따르는 제자들이 많은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패배자라고 하십니까?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니까요. 나는 글쓰기의 어떤 경지에 도달하려고 했어요. 내 책 ‘근대문예비평사 연구’? 그거 다 발바닥으로 쓴 거요. 그건 내가 아냐. 소설들에 대한 현장비평? 이건 남의 작품에 해석을 다는 것일 뿐이지. 나 스스로가 표현자가 되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비평이 아니라 시나 소설을 쓰셨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시, 소설도 썼지. 그러나 내가 그걸 도저히 잘 할 수 없었기에 비평을 시작했던 거요. 그렇지만 비평을 시나 소설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걸 못 이루었소. 그러니 패배자가 아니고 무엇이요.”
지난해 그는 젊은 문학평론가 이명원(李明元·32)씨로부터 ‘풍경’ ‘언문일치’ 등 그가 구사해온 주요개념들이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을 표절한 것이라는 문제제기를 받았다.
당시 그는 “실수”라고 짤막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지만 사이버공간을 중심으로 논쟁은 뜨겁게 번져갔다. 이미 그는 후학들에게 전진을 위해 넘어서고 부정해야 할 ‘살아있는 권위’였다. 거북스러운 일일지라도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소회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양반이 문제제기를 잘 했습니다. 사실 내가 저질러놓은 텍스트 속에 그런 오류들이 비일비재할 겁니다. 내겐 바이블인 루카치조차 오독한 부분이 있다고…. 잘못된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는 뒷사람들에 의해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겠지요.”
강의실에서 그는 제자들의 머리를 내리치며 “나를 죽여라”했다. 진정으로 그가 거꾸러지는 날에도 그는 “다 이루었다”고 웃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남겨질 일들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못다한 욕망이 죽음 후에도 남지 않을까’일 것이다.
“후회없이 살고 싶었소. 그렇게 살지는 못했지만 방법이 뭔지는 압니다. 뒤를 돌아보면 안돼. 어떻게 살더라도 되돌아보면 후회할 수밖에 없는 거요. 소금기둥이 돼 버리고 마는 거라고….”
만난 사람=정은령기자
▼김윤식 명예교수는…▼
△1936년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 출생.
세 누님을 둔 장남. 아버지는 농부였다.
△1959년 서울사대 국어교육과 졸업
작가가 되려고 국어과에 갔는데 대학에서 는 작가가 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는 것을 알았다. 이론공부를 시작했다.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 단
△1968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로 부 임. 75년부터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 임. 학과장 외에는 온갖 일을 동료들에게 떠 넘기고 내 공부만 했다. 서울대에 빚 이 크다.
△1970년 도쿄대 유학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장학금으로 동경대 유학. 이때 평전 ‘춘원 이광수와 그의 시 대’가 잉태됐다. 말로만 듣던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서점에서 발견해 밤을 새워 번역했다.
△1976년 서울대 문학박사학위 취득
△ 2001년 8월31일 정년퇴임
나는 아직 컴퓨터로 글도 못 쓰는 20세기 인간인데 마땅한 때에 물러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