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의 미래/레스터 C 써로우 지음/508쪽 1만5000원 고려원
읽기, 쓰기, 셈의 기본만 알아두면 문맹을 면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보화 사회라 불리는 오늘날 사정은 일변했다. 자동차 운전에서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습득해야 할 기술과 지식이 너무나 많다. 이러한 기술과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 정보화 사회의 부적격자나 문맹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OECD에 가입한지 1년만에 IMF의 긴급 지원을 받아야 했던 97년말 금융위기의 실상은 신문 해설기사만 가지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 나름대로 경제 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것이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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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상 처음으로 어디에서나 제품이 만들어지고 어디에서나 팔릴 수 있게 됐다”는 광고 인용문에 끌려 입수한 펭귄판(版)은 활자가 작은 것이 흠이나 단숨에 읽혔다. 일반 독자를 위해서 쓴 것인 만큼 어려운 구석이 없다. 경제학을 일상의 지식으로 만든 이 책은 방대한 정보량과 함께 오늘의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멕시코 위기의 원인은 미국
가령 멕시코의 선례는 흥미롭다. 1994년 멕시코에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거액의 적자 재정이 해소돼 재정은 균형을 이루었고 규제 완화와 민영화가 진척돼 1000개 이상의 국유기업이 민간에 매각됐다. NAFTA에 가맹해 관세를 대폭 인하했고 인플레율이 7%에 지나지 않아 사리나스 대통령은 영웅이 됐다. 그런 그는 1년반 후 온갖 죄명을 뒤집어 쓰고 망명길에 오른다.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려면 미국쪽으로 눈을 돌려야한다. 1990∼1991년 사이 경기 후퇴로 은행 예금 금리가 낮아졌다. 수천억달러의 자금이 은행예금에서 고수익 투자신탁 회사로 몰려갔다. 고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투자신탁의 경영진은 자금 일부를 멕시코에서 운영했다. 미국의 금리가 상승하자 국내 투자를 노리는 자금이 멕시코에서 빠져나갔다. 94년 2월에 300억달러였던 외화 보유고가 12월에 60억달러로 줄었다. 그러자 내국인, 외국인이 경쟁적으로 자금을 국외로 빼돌렸다.
멕시코를 지원하는데는 IMF가 규정한 것 이상의 자금이 필요했고 미국이 지원에 나섰다. 미국의 연금 기금 수천억달러가 멕시코에서 위험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 520억달러의 융자는 멕시코보다도 미국의 투자신탁 회사를 구한 셈이다. 이렇듯 금융 불안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실감나는 분석과 설명은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어 독자를 숨가쁘게 한다. 지난 20년간 미국에서는 광범위한 불평등이 확대돼 왔다. 국민 1인당 GDP는 늘어났지만 실질임금은 줄어들었다. 미국 역사상 처음보는 현상을 조목조목 분석한 것이 이 책의 주요내용이다.
자본주의 토대부터 흔들려
96년 현재 미국은 1660억달러의 무역적자를 내고 있고 1조달러의 대외 채무를 짊어지고 있다. 그러나 거액의 무역적자를 무한정 견뎌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대책이 없는 한 언젠가 세계 금융시장으로부터 버림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저자는 적고 있다. 또 끝없는 일본의 불황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과 같은 요인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경제를 다시 성장궤도에 올리기 위해서는 수출주도형 경제에서 내수주도형 경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지질학 용어를 빌려 저자는 경제의 다섯가지 요인이 동시에 움직이며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공산주의의 종언, 두뇌산업이 지배하는 시대로의 전환, 인구증가와 고령화, 글로벌 경제, 패권국가가 없는 시대가 그것이다. 그는 또 생물학에서 평형중단(平衡中斷)이라는 개념을 빌려 공룡이 멸망하고 포유동물의 시대가 왔듯이 세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고 적는다. 기술과 이데올로기가 21세기 자본주의의 토대를 흔들고 있다. 기술, 교육, 지식, 인프라를 위한 장기적 사회투자를 통해 변신을 도모하지 않으면 언젠가 사회제도 전체를 뒤흔드는 대지진이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신자유쥬의자인 저자의 생각은 어디까지의 하나의 관점이다. 한 권정도 읽고 모두 받아들이면 위험하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말도 있다. 다만 경제문제에서 정책과 정치적 혹세무민을 구별하는 시민적 상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꼭 읽어둬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유종호(문학평론가·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