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후면 집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제일 먼저 걱정되는 것이 책이다. 그 때문에 나는 밤마다 서재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 버릴 책을 고르는 것이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해 살아온 16년 동안 나는 거의 열대여섯 번의 이사를 다녔다. 집필실을 마련했다가 없애고 한 것까지 치면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열 번이 넘은 순간부터 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를 할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물론 책이다. 내가 이사갈 집의 서재의 크기에 따라 책꽂이의 크기가 결정되고 그렇게 되면 나의 책 버리기가 시작된다. 한번 읽은 것으로 족한 책들을 버리는 것이다(물론 내다버리지는 않고 대개는 아파트 지하실에 쌓아 두었다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도록 하지만). 책을 버리면서 아깝다거나 내가 이 책을 사느라 괜한 돈을 낭비했구나 하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 책들은 내게 기쁨과 실망을 주었고 나는 커피 한잔 값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취재에 도움이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을 힘들어하는 나로서는 책을 통해 그 일을 한다. 남들이 보기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잡다한 가지가지 책을 사서 보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잡고 만나러가고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고 그러는 것보다 돈도 절약되고 시간도 아낄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말로는 할 수 없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간들의 내면까지 알려준다. 몇 천 원의 돈으로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을 하느라 나는 거의 책에 십일조를 바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장서 구조조정’의 와중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책들도 있다. 책들을 돌아보며 버릴 것을 고르다 말고 가끔 주저앉아 내가 버리지 않고 끼고 다닌 오래된 책을 읽는 즐거움도 책 버리기가 주는 뜻밖의 선물이다.
며칠 전에는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제갈량(諸葛亮·181∼234)의 문집을 다시 읽었다. 이청준의 소설은 고등학교 때 처음 읽은 것인데, 역시 좋은 작품은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으면 나이 먹은 만큼의 새로운 감동을 선물한다. 젊은이들을 만나면 그의 작품을 읽으라고 권해보려고 한다.
“나의 아픔은 어디서 온 것인가. 형은 6·25의 전상자이지만, 아픔만이 있고 아픔이 오는 것이 없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 (…) 나의 아픔 가운데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다”라는 ‘병신과 머저리’의 마지막 구절은 어려서 읽었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감동을 전해 주었다.
요즘 대학교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국문과 문예창작과 학생들 중에 ‘황석영’이나 ‘이청준’ 혹은 ‘오정희’ 같은 이름을 전혀 모르는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읽어라, 읽어라 할 게 아니라 이런 구절들을 하나씩 소개해주면 어떨까. 그들이 공룡이 지나가던 시대의 소설가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회과학을 하거나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갈량 문집을 권해주고 싶다. 제갈량은 이미 약 1800년 전에 아시아 각국에 대한 정세 분석을 끝내 놓았다.
동이(東夷)족으로 불렸던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사납고 급하며 싸움을 잘한다. (…) 군신간에 화목하고 백성들이 안락할 때는 공격할 수 없으나 위의 계층이 어지러워 아래 계층의 마음이 이반되면 (…) 공격하여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적어 놓았다. 아래 계층의 마음이 이반될 대로 이반된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그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아마 대단히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는 셈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임하기 전에 이 책을 읽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났다. 인도차이나를 지칭하는 남만(南蠻)에 대해 제갈량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사람들은 욕심이 많고 싸움에는 용감하다. 봄과 여름에는 속전속결이 유리하고 오랫동안 군대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선선하다. 오래된 책을 들추며 지향(紙香)을 맡는다. 그리고는 억지로라도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껴본다.
공지영(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