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의 시대는 저무는가.
11일 뉴욕과 워싱턴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전대미문의 연쇄 테러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간 지속되어온 초강대국 미국의 평화와 번영이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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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무적의 군사력을 총지휘하는 펜타곤(국방부)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불타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하며 많은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과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테러 현장 소식을 전하는 TV 방송에선 “이제 미국과 미국인의 삶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되풀이됐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막강한 부(富)와 군사력을 갖춘 유일 슈퍼 파워 미국의 태평성대가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될 수도 있는 기로에 놓였다는 이야기였다.
▼글 싣는 순서▼
- ①슈퍼파워 자존심 휘청
- ②부시 리더십 시험대
- ③‘新테러’ 21세기 화두로
구 소련의 붕괴 이후 대적할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절정의 전성기를 누려온 미국은 하필 이 시기에, 이처럼 참혹한 도전에 부닥치게 된 것일까.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날 밤 대국민 성명을 통해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밝은 자유와 기회의 빛이기 때문에 공격의 목표가 됐다”고 설명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노선에 반대하는 반미주의 세력이 미국의 심장부를 상대로 초유의 테러를 감행했다는 해석이다.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극단적인 ‘가미카제’식 테러를 통해 미국에 타격을 가한 것은 그만큼 미국에 대한 증오가 크다는 뜻이다.
이번 사건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미국 정부와 언론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을 유력한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은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빈 라덴은 이슬람권의 대표적인 과격 테러리스트로 3주 전 미국에 대한 테러를 예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이 같은 추측이 맞다면 이번 테러는 미국의 친이스라엘 중동정책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높다. 미국은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에서도 참가국들이 이스라엘을 인종차별국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채택하려는 것에 항의, 대표단을 철수시킨 바 있다.
그러나 미국에선 통상 민주당이 공화당보다는 친이스라엘 정책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이 공화당 부시 행정부를 상대로 테러를 자행한 것은 다소 의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중동정책만이 아니라 부시 행정부가 국제사회에서 다른 나라를 무시한 채 ‘힘을 앞세운 국익’을 일방적으로 오만하게 추구해온 것이 이번 테러의 배경이 됐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에 따라 벌써부터 부시 행정부가 세계 여론을 무시하고 추진중인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 등 강경외교노선이 상당 부분 수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그러나 당장은 이번 테러로 슈퍼 파워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미국이 범인이 누구이든 철저한 응징을 추구할 것으로 보여 세계 평화를 흔드는 ‘피의 보복’이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 더욱 우려되는 상황이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12일자 워싱턴포스트지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특정 국가에 은닉하고 있는 테러리스트 조직에 대한 조직적 대응을 촉구했다. 또 카네기재단의 로버트 케이건 연구원도 테러리스트가 누구이든 미국이 선전포고를 할 필요가 있다며 전쟁불사를 주장하는 등 민간 차원에서도 강력한 대응을 주문하는 견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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