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글을 영국의 캔터베리에서 쓰고 있다. 켄트대에서 열리고 있는 유럽 정치학회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내가 발표한 논문의 내용은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어서 그 개요를 소개하고자 한다.
▼국민참여 늘고 정부는 믿음 사야▼
내가 발표한 논문의 테마는 ‘정치적 신뢰에 관한 국제비교’라는 것으로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와 유럽의 18개 국가를 비교한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유권자의 정치적 신뢰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매우 낮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18개국 유권자들에게 같은 질문으로 여론조사를 해서 얻은 것이다. 정치적 신뢰도라고 해도 여러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는 국회 정당 정부 법원 정치인 경찰 공무원 군대 대기업 매스컴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도를 조사했다.
한국 유권자는 국회 정당 정부 정치가 경찰 대기업에 대한 신뢰도가 18개 국가 중 가장 낮다. 다른 항목도 결코 높지 않다. 한국인은 전반적으로 정치에 대해 냉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뢰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는 다른 모든 항목에서도 가장 높은 신뢰도를 보였다.
회의 참석자들로부터는 정치적 신뢰와 민주주의의 성숙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사람들이 정부에 불만을 갖고, 정부를 자유롭게 비판하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민주주의의 중요한 측면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확실히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활성화보다 민주주의의 안정을 중시해 왔다.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단계에서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어느 정도 정치 참여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어 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적인 민주주의라는 것은 국민이 충분히 정치에 참여하면서도 국민이 정치를 신뢰하고 더 나아가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 참여를 정치적 신뢰라는 관점에서 한국의 사정을 살펴보자.
도표는 가로축을 정치적 신뢰, 세로축을 정치 참여로 해서 18개국을 배치한 것이다. 오른쪽 위가 정치 참여와 정치적 신뢰가 모두 높은 영역이다. 이 영역에 속하는 국가는 많지 않다.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겨우 이 영역에 들어가려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싱가포르인데 정치적 신뢰는 가장 높지만 정치 참여는 가장 낮다. 도표에서 알 수 있듯 싱가포르가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가는 지름길은 높은 정치적 신뢰를 유지한 채 정치 참여를 활성화해 곧바로 수직 상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화가 진행돼 정치 참여가 쉬워지면 정치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진다. 그러면 정치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고 그에 대응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신뢰는 낮아질 것이다. 결국 싱가포르도 일시적으로는 한국이나 대만이 있는 쪽으로 갈 것이다.
▼진짜 민주주의 성숙 지금부터▼
나는 이를 ‘발전 소용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발전 소용돌이’ 가설에 따르면 현재 한국 유권자의 정치불신이 높은 것은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과정의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이 더욱 정치에 참여하고 정부가 그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면 정치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면서 이상적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반대로 국민의 정치 참여가 높아지는데도 정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제도적으로 정치 참여를 억제하면 정치불신이 높아지면서 민주주의는 퇴보한다.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수의 서구민주주의 국가들도 정치 참여 수준은 매우 높지만 신뢰 수준은 이상적 영역의 초입에 머물러 있다. 이는 정치 참여 수준이 높은 가운데서 높은 정치적 신뢰를 얻는 것은 민주주의의 영원한 과제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그리고 일본의 진짜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은 지금부터다.
가바시마 이쿠오(도쿄대 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