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기업들은 벌써 연말이 멀지 않아 금년을 결산하고 내년을 준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미국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테러사건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세계경제는 더욱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여기서 내년도 세계경제 흐름을 전망하기에 앞서 먼저 미국과 중동국가들간의 갈등구조를 살펴보자. 어떻게 보면 이들 사이의 ‘경제적 충돌’은 이미 빌 클린턴 행정부 때 본격화되었다.
▼신용경색 걱정안해도 돼▼
20세기 말 미국은 정보기술(IT)산업에 기반을 둔 신경제를 주도하면서 유례 없는 장기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동 산유국은 취약한 지식기반 때문에 이러한 추세에서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아시아의 외환위기로 세계경제가 급랭한데다 외화 확보를 위한 석유 증산으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수준으로 떨어지자 산유국들은 극단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에 산유국들은 지난해 감산에 합의하고 예전과는 달리 이를 철저히 준수해 한 때 유가를 배럴당 37달러선으로 끌어 올렸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하반기부터 가속된 미국 IT산업의 침체에는 중동 산유국의 일사불란한 고유가 정책을 통한 경제적 반격이 주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난해 수 차례에 걸친 미국의 금리인상은 고유가로 촉발된 물가상승 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는 IT기업의 투자에 결정적인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얼마 안가 세계경제의 안정을 위해 유가를 배럴당 25달러선에서 유지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의 외교를 표방한 조지 W 부시 정권의 출범과 과격 이슬람 세력의 테러로 이들 사이의 ‘정치 군사적 충돌’은 확산될 것으로 우려된다. 현재 지구촌은 전쟁의 공포로 인해 유가가 다시 불안해지고 주가는 폭락하는 등 불황심리에 휩싸여 있다. IT산업의 침체와 유가급등이라는 악재가 겹친 세계경제는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한마디로 미국의 금융시장이 극심한 신용경색에 빠지지 않고 국제유가가 쇼크 수준으로 급등해 오랜 기간 지속되지 않는 한 공황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1929년 미국경제는 자동차산업의 과잉설비로 인한 기업 도산에 이어 금융기관의 도산으로 금융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상업은행의 40%가 도산함에 따라 통화의 유통속도는 15%나 급락했고 통화량도 30%나 줄어 신용시스템 자체가 붕괴됐다.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시스템이 불안정해 유동성 공급을 대폭 늘리는 등 적극적인 통화신용정책을 구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FRB는 시중 유동성을 평가할 통화량 지표도 산정하지 못해 시중 유동성 고갈사태에 대한 대비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밀턴 프리드먼 전 시카고대 교수는 당시 미국의 대공황은 통화신용정책의 실패에서 연유했다고 규정지었다.
지금은 미국 IT산업의 과잉설비에 따른 기업 도산과 이로 인한 금융부실 우려는 크지만 금융상황은 당시와 큰 차이가 있다. FRB 시스템의 꾸준한 발전 덕분에 유동성은 IT산업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금리인하 정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금융혁신의 결과로 IT산업의 기업부실도 벌처펀드의 역할로 시장에서 무리 없이 해소되고 있다. 뉴욕의 금융 중심부를 강타한 테러로 주식시장이 일시 가동중단 상태에 빠졌으나 700억달러의 유동성을 단기간에 공급하는 등 발빠른 대응으로 심각한 신용경색을 유발하지 않고 재가동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가 불안정도 단기 현상▼
국제유가는 예측이 힘들지만 미국의 보복공격으로 단기적으로 불안해질 것이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등해 이것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산유국들도 테러사태에 유감을 표시하면서 전쟁으로 유가가 불안해질 경우 증산하겠다고 천명하고 있어 ‘석유 무기화’와 같은 극단적 사태는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내년 세계경제는 본격적인 회복세로 진입하지 못한 채 침체수준을 이어갈 것으로 우려된다. 아직도 미국의 IT산업은 수천억달러의 과잉설비를 정리하지 못한 데다 국제유가는 부담스러운 수준으로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확산을 위한 미국의 힘의 외교와 중동국가간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은 당분간 악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문건(삼성경제연구소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