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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전진우]한광옥 대표의 귀

입력 | 2001-09-17 18:35:00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펜타곤) 등 미국 핵심부를 휩쓴 테러 대참사가 한국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그의 충성스러운 가신그룹인 동교동계 구파를 정치적 곤경에서 구출해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이 불만을 갖고 있는 주요 보수지를 비롯한 모든 신문들이 이 경악스러운 사태에 대한 보도로 온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하면서 한동안 시끄러웠을 정치 이슈가 사라졌다. TV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나 봤음직한 충격적인 장면에서 좀처럼 눈길을 떼지 못했으며 그러는 사이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김 대통령의 ‘이상한 인사(人事)’는 빠르게 뇌리에서 지워진 듯싶다. 더구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미국의 아프간 공격이 개시되면 신문과 방송은 ‘21세기의 첫 전쟁’에 매달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을지 모른다.

▼최고위원회의는 하나마나▼

그러나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민주당 당무회의가 ‘형식적 만장일치’나마 한광옥(韓光玉) 대통령비서실장을 신임 당 대표로 인준하고 인사권자인 김 대통령이 임명장까지 준 마당에 더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겠느냐, 그렇게 덮고 넘어갈 일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비록 상황을 뒤집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따져는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일은 김 대통령의 리더십 및 현 권력의 본질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선 사실을 재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9월3일 임동원(林東源) 통일부장관의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DJP 공조가 깨졌다. 9월6일 오락가락하던 이한동(李漢東) 총리가 정부 잔류를 선언하고 한 비서실장의 민주당 대표 내정설이 보도됐다. 같은 날 민주당 최고위원들은 모임을 갖고 ‘현재의 인사 흐름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한다’는 데 합의하고 그 뜻을 김중권(金重權) 대표가 당 총재인 김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 대표의 대통령 면담은 이뤄지지 못했다. 9월8일 오전 10시 민주당 최고위원들은 다시 긴급회의를 갖고 개별 발언록을 청와대에 전달하기로 했으나 이미 김 대통령이 한 비서실장을 당 대표로 지명한 뒤였다. 9월9일 김근태(金槿泰) 최고위원 동교동계 해체 요구. 9월10일 민주당 당무회의 한 대표 인준. 9월11일 권노갑(權魯甲) 전 최고위원 “동교동계 해체는 민주당 해체와 같다”고 반박. 9월15일 김 대통령 한 대표 임명장 수여.

이 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9월6일 당 최고위원들이 합의한 ‘인사 흐름 우려’의 뜻이 어찌된 일인지 당 총재인 김 대통령에게 전달조차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 대표는 헛걸음만 했을 뿐이다. 9월8일 오전의 긴급 최고위원회의는 하나마나였다. 최고위원 발언록을 청와대에 전하기도 전에 대통령의 당 대표 지명이 공개되었으니까.

지난 주말 필자와 만난 김근태 최고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당 최고위원회의를 그렇게 무력화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김 대통령이 그렇게 했으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문제는 대통령이 ‘내가 가는 길이 옳지 않느냐, 나를 도와주면 정권재창출도 저절로 될텐데 왜 도와주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만, ‘예스맨’들만 찾으려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큰 방향은 옳다고 본다. 그러나 추진 과정이 이래서는 국민은 물론 당의 공감조차 얻기 어렵다.”

▼'마이 웨이의 친정체제'▼

아무튼 이제 민주당과 청와대는 사실상 동교동계 구파가 장악했다. 그들이 줄곧 인적쇄신 요구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거꾸로 ‘마이 웨이(My Way)의 친정체제’가 굳혀진 셈이다. 내년 대선 구도의 밑그림이 정리됐다고도 하고, 동교동계 구파와 가까운 한 인사는 ‘표정관리’에 애쓴다는 소리도 들린다. 하나 ‘이상한 인사’로 민심이 등돌린 터에 당권을 동교동계 구파가 잡든, 여권 내 대선 구도가 어떻게 짜이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늦어도 내년 초까지는 쇄신인사가 있겠지. 좀 더 기다려 보자고.” “기다리긴 뭘 더 기다려. 이젠 말하는 것조차 귀찮아.”

요즘 민주당 내에서 공공연히 오가는 얘기라는데 신임 한 대표는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전진우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