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굶으면 죽는다.’ 단식 중이던 어느 야당 의원을 만류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불쑥 던진 말이다. 선문답 같은 이야기지만, 씹어볼수록 그 의미가 새롭다. 어디 굶는 것만 그런가. 잠을 못 자도 사람은 죽는다. 이 명백한 진리 앞에서 인간은 모두 하나가 된다. 동물적 상황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생각하는 동물이다. 각자 나름대로의 주관과 포부를 가지고 산다. 그렇다보니 다툼이 불가피해진다.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혼돈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을 부정하면 인간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같으면서 다르고, 이질적인 가운데 공통된 요소가 반짝거리는 것이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양상이다.
▼美테러는 차이와 대립의 표출▼
생각해 보라.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모두 같은 말을 쓰고, 강원도 사람과 제주도 사람이 똑같은 음식을 먹는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5000만 국민 전부가 진보나 보수 둘 중의 한가지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쳐 있다면, 그래서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적화통일이든, 북진통일이든 통일만 되면 좋다는 생각 일색이라면 우리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는 ‘단일 민족, 그리고 유구한 역사’로 우리의 자화상을 그리는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 점심을 주문하는 자리에서, ‘나도 같은 걸로’를 즐겁게 복창하고 그것을 통해 진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도 그만둘 때가 되었다.
잡종번식(雜種繁殖)이 생물학적으로 더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상식은 우리의 삶, 문화 그 자체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이다. 다양성은 좋은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이질성은 상당한 수준에서 우리 삶을 윤택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양념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는 차이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 것인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인간은 서로 달라야 한다. 차이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 다름의 미학은 일정한 한계 위에서 빛을 발한다.
미국의 세계적인 철학자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는 유대인이다. 그는 말한다. 관용은 차이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차이는 관용을 필요로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관용은 무차별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일정한 규율이 전제돼야 비로소 관용이 관용다워진다는 생각이다. 그 바탕 위에서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다운 삶에 대한 동경, 민주적 정치질서에 대한 보편적 헌신, 이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차이는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맹목적 파괴에 불과하다. 다양성으로 포장한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 뉴욕의 마천루가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렸다. 그 대재앙은 인류 전체에 심각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내리꽂히던 테러 비행기, 그것은 엄존하는 차이와 대립과 증오의 표출 그 자체였다. 그것은 또한 서로 다른 생각과 종교와 삶의 양식이 평화롭게 공존해야만 하는 당위를 일깨워준 비극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규범과 질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도 경보음 울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차이의 미학과 공존의 지혜, 그 아슬아슬한 곡예를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숙명, 그 문명의 현 주소를 직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류만 있고, 그 주류에서 벗어난 다른 생각이나 기호, 이데올로기는 좀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단일민족, 그 철옹성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위기의 파편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비주류가 설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한마음, 한뜻의 허구를 던져버려야 한다. 그러면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정치적 철학적 규범과 제도적 틀을 만들어야 한다.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과제 앞에서 우리는 지금 팔짱만 끼고 있다. 일견 동쪽과 서쪽을 한꺼번에 가야하는 듯한 모순율 앞에서 비틀대고 있다. 마천루만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서병훈(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