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필자는 한국인 동료 교수들과 함께 골프장에 있었다. 10번홀에 이르렀을까, 그 넓은 골프장이 우리들의 독무대로 변했다. 우리 팀을 앞서거나 뒤따르던 미국인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국을 강타한 테러 공격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나중이었다. 골프를 도중에 그만두는 희귀한 사태, 하지만 그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미국은 모든 것이 ‘일단 멈춤’ 상태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발이 묶였고, 증시(證市)도 문을 닫았으며, 메이저리그 야구 또한 휴업에 들어갔다.
▼전국 곳곳에 성조기 물결▼
한 주일이 지난 지금, 많은 것들이 점차 정상화되어 가고 있다. 워싱턴의 국방부와 뉴욕 맨해튼의 피해 수습이 차분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월스트리트가 업무에 복귀했으며, 미식축구(NFL)도 경기를 재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테러 사태가 남긴 마음의 상처만은 여태껏 아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세계무역센터를 테러 여객기가 뚫고 들어가는 장면을 생중계로 본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그것은 아직도 심장에 박힌 탄환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이번 사태로 인해 미국인이 치르고 있는 정신적 고통은 다양하고 복잡해 보인다. 우선 인간과 인간성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가 자리잡고 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담대하게 잔인할 수 있을까 하는 윤리적 허무주의인 것이다. 또한 미국 본토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된 데 따른 불안감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가세하는 것이 미국인 특유의 구겨진 자존심이다. 세계 최강국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이 ‘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치욕을 느끼고 있다.
한편으로는 ‘준비된’ 테러를 사전에 막지 못한 자국 정부의 무능과 나태를 비난하는 마음도 미국인들 사이에 결코 적지 않다. 게다가 반(反)테러 전쟁 불사의 실제적 효과에 대해서도 내심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무력 행사가 또 다른 보복을 자초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제3세계와의 전쟁에서 한번도 ‘화끈하게’ 승리한 적이 없는 미국으로서는 아프가니스탄과의 일전(一戰)에서 과거 월남전의 악몽을 떠올리는 눈치다. 어쩌면 바로 이러한 정서적 불안과 동요야말로 테러집단이 가장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번 참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심리적 차원의 위무(慰撫)나 재활사업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사고 직후부터 교회나 성당 등 종교기관들이 문을 활짝 열었고, 연방재난관리청(FEMA) 등에서도 각종 상담 및 정신치료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퍼스트 레이디가 어린이들의 정신적 안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가 하면, 테러리즘 전문가 못지 않게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 심리학자들이다. ‘민관(民官) 합동’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의를 수렴하기 위한 타운미팅이 확산되고, 정책 결정자들은 생방송을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일반 국민을 상대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상의 기저에서 목하 극도로 고조돼 있는 것이 미국 내셔널리즘이다. 전국적으로 넘쳐나는 성조기의 물결과 ‘갓 블레스 아메리카(God bless America)’의 선율이 미국인의 단결력과 자긍심 및 자신감을 전례 없이 고취하고 있는 것이다. 대내적으로 이런 현상 자체는 말릴 수도, 욕을 할 수도 없다. 문제는 그것의 대외적 의미와 파장이다. 전쟁을 포함한 미국의 최종 선택은 물론 그들 고유의 몫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국을 위한 반테러 응징행위로 그쳐야 한다. 미국이 그것을 세계의 전쟁으로 확대시킬 권리는 없는 것이다. 특히 이번 기회를 통해 미국이 세계 각국의 ‘충성도’를 시험하겠다는 발상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지나친 국가주의는 독약인데…▼
몸에 이로운 약이 되기도 하고 독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다. 작금의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분출되고 있는 국가주의적 미국 정서가 적지않게 불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정한 패권주의는 강국이 아니라 대국에서,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스스로 이해하기에 역사는 일천하고 경험은 빈약한 나라가 바로 미국인 듯 싶다.
(한림대 교수·사회학·현 워싱턴대 교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