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독일어 교본에서 읽은 하인리히 뵐의 단편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의 직업은 하루 종일 다리 위에 앉아서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의 수를 세는 일이었다. 그가 하루하루 집계한 숫자는 그 다리의 이용도와 효율성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통계 자료였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곤혹스러웠던 일은 자기가 남몰래 사랑하는 ‘그녀’를 그 통계숫자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저만치 보이기 시작하면 그는 당황한 나머지 세고 있던 숫자를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도덕성-공정성 전제돼야▼
낯선 언어로 떠듬떠듬 읽어 내려간 데다 기억 속에서 어느 정도 망실되거나 변형되었겠지만 사랑을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자의 아름다운 고통은 지금도 내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의 삶에는 끝내 통계화될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통계의 정확성만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그의 망설임은 단지 통계의 오차를 만드는 불필요한 요인에 불과할 것이다. 요즘처럼 통계와 물증을 갖다대야 믿을 뿐 증명이나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세태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통계란 과연 객관적인가. 통계의 순도를 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장치가 과연 있는가. 다시 반문해 보면 대답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통계를 다루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공정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특정한 이해관계와 목적을 위해 악용되고 조작될 위험을 항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우스갯소리도 나온 것 같다. 거짓말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터무니없는 거짓말, 정말 같은 거짓말, 그리고 통계. 아마도 통계의 허구성을 꼬집기 위해 나온 말일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전 노동부 산하 고용안정센터의 통계가 45%나 부풀려서 조작된 사실이 드러나 모두들 어이없어 했다. 실업률이 몇 %로 떨어졌다느니 요란스러운 홍보 문구를 볼 때마다 실생활에서 느끼는 바는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야 그 까닭을 알 것 같다. 그에 이어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는 모르겠지만 통계청이 집계한 근로자 실질임금이 계산 착오로 잘못 발표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통계청마저 이 지경이라면 앞으로 정부에서 발표하는 통계를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확성을 생명으로 하는 통계들이 이렇게 조작되었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세워진 여러 경제 지표나 정책까지도 그 현실성을 보장받기가 어려운 일 아닌가.
물론 인간이 처리하는 이상 오차도 있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수학이나 과학이라는 것도 인간의 수많은 오류 위에 건설된 학문인지도 모른다. 장 피에르 랑탱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실수한다’는 바로 그런 통찰을 보여주는 책이다. 랑탱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학적 공리들이 실은 실수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오류의 과학사를 재구성한다. 그에겐 연구자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부닥치는 욕망과 감정, 선입견 등까지도 창조적 오류를 이루는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번에 드러난 통계 조작은 소설 속에 나오는 낭만적 오류도, 과학을 진전시켜 온 창조적 오류도 아니다. 강요된 과열경쟁 속에서 눈에 보이는 실적 위주의 관료제가 낳은 어처구니없는 코미디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소통되고 있는 통계의 허구성을 드러낸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처럼 사랑과 발견이 아니라 은폐와 타협을 위해 오류을 범하게 될 때 통계는 어떤 무기보다도 위험한 것이 되고 만다.
▼수용자의 맹신도 위험▼
그러한 위험에는 통계를 다루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통계를 지나치게 맹신해 온 수용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통계에 대한 맹신은 때로 거대한 환각을 만들어내고, 그 환각은 무책임과 비합리성이 싹트는 온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數)의 바다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차고 넘치는 통계들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자주 인간이 제거되고 현실이 실종되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왜일까. 기술 자체의 정교함보다 기술을 다루는 자의 윤리적 성찰과 고민이 아쉬운 시대라는 건 비단 통계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희덕(시인 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