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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칼럼]'이용호 의혹'과 통치체제

입력 | 2001-10-03 18:45:00


국회의 국정감사를 통해서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이용호 게이트’는 한 개인의 단순 비리사건이 아니라 통치 시스템의 핵심 부분들이 개입된 조직적 부패사건이다. 최초의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로 그 동안의 적폐를 불식시킬 것이라고 믿으며 이 정권 초기에 걸었던 기대가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한 심정은 실로 착잡하기 그지없다.

증권시장에 매달렸던 일반 시민들의 허탈감은 말할 것도 없고 구조조정과 관련된 공적자금도 어떻게 돌아갔는지 이제는 의심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되었다. 질서 유지의 중책을 지고 있는 검찰과 경찰까지 개입되고 보니 시민들은 각자의 안전을 스스로 책임지는 도리밖에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위험 수위에 이르게 되었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 위험수위▼

가부장제가 확대된 형태인 ‘가산제(家産制)’ 권력 혹은 ‘가독제(家督制)’가 이 시대의 정당한 지배체제라면 이번 일도 별로 문제될 게 없다. ‘가독장(家督長)’을 정점으로 그 아래 가신들이 명령을 받들어 아전(관리)들을 이용해 세금을 거두고 반발이 일어나면 요즘 ‘조폭’(조직폭력배)이라고 불리는 가독장의 사병(私兵)들을 동원해 진압하고 지배와 복종의 정당성의 근거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삼는 형태는 우리에게 오랜 전통으로 굳어져 왔었다.

이런 체제 아래에서는 권력에 대한 경쟁 집단은 물론 용납되지 않으며 중간에 노략질로 발호하는 세력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통제한다. 그리고 통치 윤리도 철저한 개인적인 충성에 근거하며, 경제도 계산적인 합리성과는 별로 상관없이 이루어지며 조세의 일부는 가독장의 승인 아래 가신이나 아전들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백성들에 대해서는 가독장이 선심을 베풀어 민심을 얻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직접적인 지지로 중간세력을 견제한다.

이러한 전통적 지배체제의 면모들은 현대적인 민주정치의 장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과거의 정권들에 있어서도 그런 면모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번 사건을 보면 가히 가독제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하다. 야당이 있고 의회가 있고 언론이 있어서 폭로는 되었지만 그런 사건이 표면에 드러나지 안은 채 버젓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정치구조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표면상의 민주공화제와 이면적인 민주 가독제가 공존하는 것이 바로 그 이중성이다. 표면적으로는 헌법에서 정당성을 찾고 이면적으로는 권력자가 조상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는 것도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국민의 참배를 의무화하지 않는 정도가 현대적일 뿐이다.

지금 정권이 이러한 이중성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나중에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국민은 가독제적 편가르기에 익숙해져서 가까운 장래에 화합이 이루어질 것 같지도 않으며, 정권은 정권대로 그것을 현실로 간주하고 정면돌파를 시도할 것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정권은 다음에 올 타격을 고려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권 재창출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 대선은 만약 실행된다면 살벌한 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승리는 모순을 은폐시켜 줄 것이며, 패배는 생존을 위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중적 정치행태 빨리 끝내야▼

그런데 문제는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그 이중성이 해소될 것이냐 하는 데 있다. 지금의 제도적 장치를 그대로 두고는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싸우다 보면 서로 비슷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상대가 벌여놓은 장에 따라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한나라당이 대북 쌀 지원을 들고 나온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국가가 처한 역사적인 환경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정치 행태나 통치 구조의 이중성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은 자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권 야당은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간이 대단히 촉박하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규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통치 체제에 관한 역사적인 대안을 제시해주기 바란다.

노재봉(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