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테러 보복전쟁과 국내의 불투명한 경제전망 등으로 나라 안팎의 큰판이 뒤숭숭한 터에 한 나라의 대학 문제를 말한다는 것은 소중한 지면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오늘의 뒤숭숭한 사태는 비교적 가까운 장래에 무언가 결말이 나거나 또는 별 수 없이 또 다른 국면으로 변해갈 일들인 데 비해, 대학의 문제는 10년 혹은 20년 후에 나라의 형편을 크게 좌우하게 될 과제여서 감히 붓을 들었다. 또 바로 지금이 그 대책의 틀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될 결정적인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장 논리 앞세워 재촉해서야▼
대학이 최근 수년 동안 정부를 포함한 바깥 사회로부터 일관되게 듣는 요구는 경쟁력을 키우라는 것이다. 대학도 이제 더 이상 상아탑으로만 남아 있을 수 없으니, 바깥의 수요에 걸맞은 교육과 연구를 하라는 말이다. 학생을 뽑는 데도 그래야 하고, 교수들의 근무조건을 정하는 데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지망하는 학생의 수가 적으면 그 학과는 결국 문을 닫는 수밖에 없고, 교수들의 근무기간과 봉급도 ‘연구실적’에 따라 정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라 경제가 필요로 하는 연구를 많이 해서 그 보상으로 학교 재정을 꾸려 나가라는 것이다.
요즘 여러 대학에서 한창 진행 중인 학부제, 연봉제, 산학협동 연구 등의 실험들은 이런 사회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작금의 변화를 여기서 실험이라고 한 것은 이 새로운 조치들이 우리네 대학을 결국 어떻게 변질시킬지 누구도 확실히 모른 채 서두르고 있다는 뜻이다. 대학의 운영과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대학 안팎의 사람들은 대학 외부의 급박한 시장 변화에 압도된 탓인지 시장 수요에 합당한 변화를 하루 속히,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받아들이라고 재촉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한편 대학 안에서 이런 변화를 몸소 실천해야 할 사람들, 즉 교수들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전체로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본디 시장 수요에 적합한 관련 분야에 있던 이들은 이 새로운 변화를 환영하고 또 잘 적응하기도 하는 데 비해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있다. 소위 ‘인기 학과’와 ‘비인기 학과’ 사이의 희비(喜悲)가 엇갈리고, 오직 시장 수요만 전망해 새로운 학과를 서둘러 만들거나 여러 학과들을 통폐합하기도 한다.
대학은 본디 시장수요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쟁 게임에 적합하게끔 짜여진 체제와 기관이 아니었다. 때문에 소위 ‘수요자 위주’로의 변화 요구에 지리멸렬하고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때에 대학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진심으로 뜻을 모아야 할 일은 대학 내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해도 좋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선진산업국이라는 나라들의 경쟁력도 그 나라의 대학들이 지난 100년, 200년 동안 지적(知的) 역량을 축적했기 때문이 아닌가. 다시 말해 변화무쌍한 시장수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고 오직 지적 호기심, 학술적 체계화, 공익적 관심에 열중해 축적해 놓은 업적의 바탕 위에서 저들이 오늘날 선진국이 된 게 아닌가 하는 말이다.
더욱이 이 시대처럼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 변할수록 과연 누가 한 세대, 두 세대 후의 세상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대학이야말로 이처럼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한 나라와 사회 그리고 나아가 인류의 항상적(恒常的) 의지와 지성의 안전판이며 담보(擔保)이다.
오늘 우리 모두의 생존 조건인 세계 경제가 급박하게 그리고 각박하게 변하고 있는 터에 대학만 온통 초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학문 축적 기능 변할 수 없어▼
저마다 처지에 따라 세상 변화에 적응할 생존 전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나라 전체 그리고 대학마다 변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합의를 하고 또 그런 것들을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몇 년 전엔가 어느 재벌기업 총수가 아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 무엇이든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지만 대학도 그렇게 해서는 우리 모두의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권태준(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정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