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권총만으로 1개 소대 규모의 적을 쓰러뜨린 다음 고작 한 두 마디를 내뱉는 ‘영웅본색’의 저우룬파(주윤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킬러’와 ‘수다’는 함께 할 수 없는 이미지다. 젊은 감독 장진(30)의 첫 메이저 상업 영화인 ‘킬러들의 수다’는 제목부터 이런 관성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다.
자칭 ‘4인조 남성 킬러’인 상연(신현준) 재영(정재영) 정우(신하균) 하연(원빈)은 의뢰인의 부탁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 청부업자들. 솜씨도 대단해 시속 130㎞로 달리는 차에 탄 목표물을 총알 한방에 쓰러뜨리는가 하면 폭약도 자유자재로 설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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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그러나 정작 일상에서는 얼치기다. 선생님을 죽여달라는 여고생 하나를 돌려보내지 못해 쩔쩔매고, 자신들의 집에 잠입한 검사가 컴퓨터 모니터에 써 놓은 “I never miss you(너희를 꼭 잡겠다)”를 “나는 결코 ‘미스 유’가 아니다”고 번역할 지경이다.
관객은 이런 킬러들의 코믹 펀치에 키득대면서 서서히 ‘간첩 리철진’ 등 장진 감독의 이전 작품을 관통하는 특유의 블랙 코미디를 찾으려 할 지 모르겠다. 굶주린 북한 인민을 구하고자 슈퍼 돼지 종자를 훔치러 남한에 온 간첩을 내세워 뽑아냈던 페이소스(비애감)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웃음은 ‘블랙 코미디’보다는 오히려 최근 흥행작들의 공통 분모인 엽기 코드에 더 가깝다. 그래서 킬러들은 장진의 이전 작품에 등장했던 소시민들이라기 보다는, 90년대 이후 영화 속에 자주 나오는 매력적인 킬러(또는 갱스터)들의 모자이크처럼 보인다. 이들은 ‘히트’(1995)의 로버트 드 니로 조직처럼 일에는 철저하면서도, ‘저수지의 개들’(1992)의 쿠엔틴 타란티노 일당처럼 우유부단하고, 가이 리치가 ‘록 스톡 앤 투 스모킹 배럴스’(1998)에서 만든 ‘똘마니’들처럼 좌충우돌한다.
장진 감독은 최근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은근하고 정련된 웃음을 선사한다. 특히 ‘작업’ 대상인 미모의 임산부를 죽이지 못한 정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은 관객에게 영화 속으로 하염없이 빨려드는 ‘웃음의 삼투압’을 맛보게 한다. ‘엽기적인 그녀’가 팥빙수의 달짝지근한 맛이었다면, 장난기 넘치는 편집까지 가세한 ‘킬러들의 수다’는 스타벅스 커피의 세련된 그 맛이다.
고민을 벗어 던진 장진의 코미디를 영화 내내 받쳐 준 배우들의 호연도 빼놓을 수 없다. ‘비천무’ 이후 끝없이 추락할 것 같던 신현준은 배우 경력 11년이래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면서 부활의 불씨를 당겼다.
장진과 대학(서울예대) 선후배 사이인 정재영과 신하균은 극 후반 테러 씬에서 마구 나사가 풀릴 것 같던 영화를 온몸으로 버텨낸다. 제작진이 걱정했던 원빈도 기대 이상. 킬러들을 쫓는 검사 역의 정진영은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웃음을 더했다. 15세 이상 관람 가. 12일 개봉.
ddr@donga.com